
강정은 땅 아래서 물이 솟아나는 마을이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터를 일컬어 ‘물 위에 뜬 마을’이라고 했다. 숨골로 물이 곧장 빠져버리는 화산섬에서 논습지를 만들 수 있어서 일찍부터 벼농사가 가능했고, ‘일강정’이라 불렀다. 볕이 좋았고 날은 온순해서 무엇이든 심기만하면 잘 자라는 농토였다. 마을 해안 얕은 주상절리 바다는 단물과 짠물이 만나는 기수역이었고 당연히 생태계의 보고였다. 구름처럼 펼쳐진 너럭바위, 구럼비는 너무도 당연한 일상의 장소이자 강정의 심장이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자라는 내내 가까이 있었다. 이렇게 갑자기 사라질 수 있는 것이라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에 온갖 불법 폭력 다 끌어모아 해군기지를 지었다. 해군은 바다에 나가기도 전에 먼저, 마을을 갈라놓고, 정당한 질문을 죽이고, 절차적 민주주의도 죽이고, 불의에 저항하는 인간의 마음에다 환멸을 심어 죽였으니, 여기가 바로 전쟁터다. 덕분에 쓰러졌다. 정의도. 원칙도. 평화도. 사랑도. 새들과 나무, 바람마저도.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은 방법으로 빼앗겼다. 해군기지로부터 당연하게 여겨왔던 공기같은 일상을 빼앗긴 다음에야 우리는 그것이 ‘평화’였다고 고백한다. 이제 ‘구럼비’란 잃어버린 모든 것의 이름이고, 되찾아 회복해야 할 모든 일의 이름이다. 하여 우리는 빼앗긴 날의 좌표에 서서, 빼앗긴 것의 이름을 부르며, 이야기를 전승하고자 한다. 보이지 않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구럼비와 계속 함께 싸우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 과거와 현재의 연대
1911년 3월 7일. 한일합방이 일본에 의해 사후 승인되었다. 1936년 3월 7일. 히틀러는 라인라트 지역 영구 비무장화를 결정한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그 곳을 재점령하였다. 1965년 피의 일요일. 미국 앨라배마주에서 경찰은 인권운동가 행진을 습격해 사람을 죽였다. 1978년 3월 7일, 한미 합동 군사훈련인 팀스프리트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12년, 3월 7일 새벽 3시. 불법적이고 폭력적으로 강행된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위해 강정마을 구럼비 폭파가 시작되었다. 최소 두 달간 지속된 발파에 수많은 동식물들이 학살되었다. 구럼비에서 수 킬로 떨어진 곳, 방바닥 밑에서도 감지된 진동은 충격을 주었고 닥쳐올 미래를 예고하였다. 우리는 공동체와 평화의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들을 멈추지 않았지만 아직도 마음 속 깊이 울고 있다. 그 날 제주에서, 서울에서, 전국 곳곳에서,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은 울고 있었다. 불의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 계속, 연대하기
구럼비는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아름다운 장소였다. 그것을 빼앗긴 우리는 하나의 지역적 산물로서 구럼비를 고정시키지 않고 같은 서사로 반복되는 아픔과 저항의 이름으로 곳곳에 연대하고자 한다. 과거의 파괴에 구속되지 않고, 스스로를 저항하는 구럼비로 부르며, 이로부터 출발해 반복되는 미래가 나타나지 않도록 우리 곁의 구럼비들을 살피고자 한다. 끔찍한 신자유주의와 군사주의 폭력 상황으로 고통받는 세계의 섬들과 지역과 사람들과 계속해서 연대할 것이다. 공동의 기억을 통해 미래에 대한 전망을 만들고, 우리가 그 미래로 갈 수 있다는 믿음을 함께 나눌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것이 지금 여기서 ‘보이지 않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구럼비에서 함께 그 이름을 부르는 이유다. 제주의 땅과 바다, 물이 사라지고, 빼앗긴 곳 위에 우주센터와 레이더가 세워지며 닥칠 생존과 미래의 위협 속에서 우리는 가슴 아픈 과거를 미래를 위한 투쟁의 동지로 불러낸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우리와 함께 싸우자고 요청한다.
‘아직 끝내지 않은 해군기지 반대투쟁’에서 우리는 모두가 모두의 힘으로 세계의 질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구럼비 발파’의 경험이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돌아올 모두의 평화로 지속될 수 있게 하자. 더디더라도 그물을 엮어 가듯이 그 경험과 기억들을 조금씩 촘촘히 엮어 가며 우리가 흩어지지 않도록 붙잡자. 무너지는 세상에서 존엄을 잃고 불안해하며 삶의 위협에 떨고 있는 존재들이 연대의 손길에 닿도록 하자. 그것이 ‘사랑’이며, 그 자체로 희망이다. 그렇게 오늘도 구럼비는 살아있다.
2025년 3월 7일 이자 열세 번째 3월 7일에
# 보이지 않으나 엄연히 존재하는 구럼비에 서서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주민회, 강정친구들, 강정평화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