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름지기 배우는 신비로움감과 친숙함이 공존해야 비로소 은막의 스타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예리는 흥행 여부를 떠나 '코리아'의 최대 수혜자가 되리라는 확신이 드는 배우다.
수많은 영화에서 주연을 해왔지만 그건 모두 독립영화, 저예산 영화였을 뿐 상업영화는 2009년 '파주'(감독 박찬옥)의 조연 경력이 전부인 한예리가 북의 차세대 에이스로 스토리의 긴장감을 더해주는 인물인 동시에 결정적인 순간에 '현정화'(하지원)를 복식 경기에 참가하게 만드는 인물이기도 한, 현정화와 '이분희'(배두나)에 이은 톱3 캐릭터인 '류순복'을 꿰찼다는 것부터가 일대 사건이기 때문이다.
한예리 스스로에게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문현성(32) 감독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행여 꿈이 깨질까 두려웠다. 그저 '감독님께서 제가 성실히 하는 모습을 보고 '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순복이와 비슷한 부분도 있어 보여 감독님이 신뢰하지 않았나'고 생각할 따름이다.
한예리에게 류순복은 엄청난 기회인 동시에 과중한 스트레스였다. 연기는 다음 문제다. 혹시라도 사랑하게 된, 그래서 꼭 해보고 싶었던 유순복을 놓치지 않을까 두려워서였다.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부터 순복이에게 푹 빠져들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저보다 큰 배우, 인지도가 있는 배우가 오면 내줄 수 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죠. 드라마를 갖고 가는 인물이고, 내용상 큰 인물이니 아직 저를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이 제게 믿고 맡기기는 쉽지 않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어요. 사실 더 큰, 더 좋은 배우가 하겠다고 하면 내가 감독이라도 고민할테니까요."
기우였다. 류순복은 한예리라는 작고, 인지도 낮은 배우를 만나 만개했다. 오히려 류순복을 모르는 사람이나 알고 있는 사람이나 모두 '코리아' 속 한예리를 진짜 류순복으로 받아들일 정도다. 한 마디로 문 감독의 뚝심과 감각이 어느 신인 배우에게는 기회를 줬고, 감독 본인에게는 첫 연출작의 밀도를 높이는 성과로 돌아온 셈이다.
류순복은 '대회 울렁증'이 있어 제 기량 발휘를 못한다. 문득 거의 독립영화만 해오다 두 번째 상업영화, 그것도 '파주' 보다 훨씬 큰 규모의 상업영화를 하게 된 한예리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작은 현장에 익숙해 대규모 현장이 두렵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큰 영화는 처음이나 다름없기는 했죠"라는 답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류순복처럼 '두려웠다'는 말이 이어지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딱히 크게 다른 것은 없더라구요. 독립영화를 할 때보다 스태프가 정말 많고, 배우도 많고, 보조 출연자도 많고…. 식구가 정말 많다는 것 외에는 딱히 크게 다른 것은 없던데요?" 여배우한테 어울리는 말은 아니지만 '괴물신인'의 탄생이나 진배 없다.
한예리에게 정말 어려웠던 것은 탁구다. "탁구가 돼야 뭘 하니까요. 탁구만 잘치면 연기도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죠."
한예리에게는 핸디캡이 또 있었다. 오른손잡이인 배두나(33)가 '코리아'에서 왼손잡이 이분희(44)를 연기하기 위해 왼손을 써야 했던 것이 '배두나 왼손 연기'로 이슈가 됐다. 거기에 가려졌지만 한예리는 같은 시기에 정반대 고통을 겪어야 했다. 한예리는 왼손잡이, 류순복은 오른손잡이였기에 발생한 아이러니였다.
"오른손을 쓰게 되니 처음에는 굉장히 어색했어요. 무엇보다 파워가 없었기 때문이죠. 안 쓰던 근육이다 보니 약하더군요. 그런데 갑자기 무리해서 많이 쓰니까 뼈 가까이 있는 근육들이 조금씩 아파오더니 결국에는 부상도 겪었죠. 몸도 좀 틀어지기도 했구요. 힘들기는 했지만 순복이가 세상에 없는 선수가 아니라 실제 존재하는 선수를 재현하는 것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탁구를 제대로 연기하기 위한 끝없는 훈련과 운동은 '늘씬한 몸매'가 생명인 여배우들에게 '건강미'라는 허울로 포장된 '말벅지'와 '뽀빠이 팔뚝'을 선물했다. 한예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짱짱한 팔 다리 근육은 물론, 당장 부분모델을 해도 될 것 같은 고운 손 곳곳에 굳은살, 물집이 잡혔다.
"촬영 한 달 전부터 하루 4시간씩 연습을 했어요. 저는 오른손을 써야 해서 6시간 가까이 했구요. 체력이 필요하니 웨이트도 평상시 하는 운동의 배로 했죠. 급기야 지난해 촬영 기간에 전주국제영화제의 레드카펫에 서면서 일이 벌어졌어요. 드레스를 입었는데 허벅지가 남달랐던 것이죠. 사진이 인터넷에 떴는데 그것을 본 감독님들이 제 우람한 허벅지를 평생 사진으로 남게 했다고 어찌나 미안해 하시던지요. 호호호."
그런 노력을 인정 받아 대중은 한예리에 대해 '한 번 보면 계속 보고 싶다'는 찬사, '너무 귀엽다'는 애정, '연기 좋다'는 호평. '묘한 매력이 있다'는 관심을 쏟아내고 있다. 멜로 '건축학개론'(감독 이용주)에서 '납뜩이' 조정석(32)을 발견했던 것처럼 '코리아'에서 '류순복' 한예리를 찾아낸 것에 희희낙락하는 관객들도 많다.
한예리는 "그렇게 생각해주면 감사하죠"라는 솔직한 반응과 함께 "제가 보기에는 이번 제 연기는 79점이에요. 물론 100점 만점이죠. 그래도 편집이 많이 안 됐고, 관객들이 순복이를 보고 공감한 것 같아서 후하게 매겼네요"라고 뿌듯함과 아쉬움을 동시에 토로한다. 그래서일까, '건축학개론'에 이어 MBC TV 수목극 '더 킹 투 하츠'의 '은시경'으로 바로 만난 조정석과 달리 한예리는 당분간 안방극장에서는 만나기 어려울 전망이다.
"'코리아'를 하면서 '나는 아직 TV 드라마로 갈 때가 아니다'고 느꼈어요. TV는 이미지나 캐릭터가 중요한데 지금의 저로서는 연기는 뭐든 다양하게 해보고, 많이 부딪쳐가며 경험을 많이 쌓는 것이 더 필요하거든요. 그래서 앞으로도 영화에 몰두할 생각입니다. 물론, 저도 제 나이를 알고 있죠. 그렇지만 멀리 보고 싶어요. 배우는 나이가 들어도 나쁘지 않거든요. 아니, 보여줄 것이 더 많을 거에요. TV는 제 커리어가 좀 더 쌓이고, 어느 정도의 위치에 서게 돼 미니시리즈 여주인공으로 당당히 나설 수 있을 때 갈래요."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