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일 민주통합당 신임 원내대표로 선출된 박지원 당선자는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동교동계 출신 3선 의원(19대 포함)이다.
1942년 전남 진도에서 출생한 그는 단국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 30대 초반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 LA를 거점으로 사업가로 자수성가한 박 원내대표는 70년대 미국 망명 중이던 김 전 대통령을 만난 것을 계기로 동교동계에 합류했다.
그는 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해 특유의 부지런함과 순발력, 뛰어난 메시지 전달력을 바탕으로 4년간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98년에는 당선자 대변인을 거쳐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관광부 장관 등을 지내며 김 전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렸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전에는 막후에서 회담을 성사시켜 대북 교섭력을 인정받았고, 이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비서실장 등을 지내며 김 전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세련된 마당발'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사회 각계에 뻗친 정보력은 그의 가장 큰 자산으로 평가받는다.
◇ 대북송금 관련 구속수감도… 18대 총선서 무소속 당선
하지만 그는 참여정부 출범 이후 대북송금 특검이 시작되면서 기업체의 자금을 북한에 불법 송금한 혐의로 구속 수감되는 시련을 겪었다.
그는 정권 말기인 2007년에야 사면·복권될 수 있었고 2008년 18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전남 목포에서 당선돼 민주당에 복당했다.
민주당 입당 후에는 정책위 의장으로 임명돼 정치적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고, 18대 국회 중반인 2010년 5월 민주당 원내대표에 선출되면서 DJ의 그림자를 벗어나 본격적인 자신의 정치를 시작했다.
원내대표로 재직한 1년 동안 '군기반장'을 자처하며 사분오열된 당을 정비했고, 거대 여당인 한나라당에 효과적으로 맞서면서 지도력에 합격점을 받았다. 현 정권에서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와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 낙마, 세종시 원안 추진, 6·2 지방선거와 4·27 재보선 승리 등을 이끌어내며 여권에 치명타를 날렸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는 원내대표직을 마친 뒤부터 가장 유력한 당권 후보로 거론돼 왔지만 10·26 재보선 이후 추진된 야권 통합 과정에서 전당대회 시기를 놓고 지도부와 마찰을 빚다 결국 최고위원으로 선출되는 데 머물렀다.
이후 '반통합파'로 지목되면서 입지가 다소 축소되기도 했지만, 다음달 전당대회에서 당권을 노리다 원내대표 경선으로 선회하면서 또 다시 새 국회 임기의 첫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특히 이번 경선에서 이해찬 상임고문과 각각 원내대표와 당 대표를 나눠맡기로 합의했다는 이른바 '역할분담론'이 거론되면서 나머지 세 후보의 표적이 됐지만, 결국 원내대표로 선출되면서 전략가로서의 존재감을 인정받았다.
박 원내대표는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최고위원의 권한을 넘겨받고 비대위원들과 함께 차기 지도부 선거가 이뤄질 전당대회를 준비하게 된다.
▲1942년 6월 5일 전남 진도 출생 ▲단국대 경영학과 ▲미주지역한인회 총연합회장 ▲14대 국회의원 ▲청와대 공보수석 ▲문화관광부 장관 ▲청와대 정책기획수석 ▲대통령 비서실장 ▲김대중평화센터 비서실장 ▲18대 국회의원 ▲민주당 정책위의장 ▲민주당 원내대표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