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집 전문서점 시옷서점과 한그루 출판사가 공동으로 기획하고 발간하는 시집 복간 프로젝트 ‘리본시선’의 세 번째 시집이 나왔다.
1998년 《현대시》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섬세하면서도 날카로운 감수성으로 제주의 이미지를 그려내면서 제1회 서귀포문학상을 수상했던 정군칠 시인. 안타깝게도 2012년 7월 8일, 우리 곁을 떠난 시인의 타계 10주기를 맞아 그의 첫 시집을 복간하게 되었다.
시옷서점은 복간 머리말에서 “서늘한 정신으로 제주의 이미지를 그린 이 시집이 고산식물처럼 외롭게 폈다 지는 것이 안타까워 다시 생명을 불어넣는다. 우리는 이 시집이 갖는 자장에서 더 오래 뿌리를 내려야 할 책임이 있다.”라고 전했다.
이번 시집은 2003년 발간 당시의 수록 작품을 그대로 싣고, 해설과 추천사도 초판의 것을 따랐다. 오랜 시간이 흘러 시집도 시인도 더는 만날 수 없지만, 그의 시만큼은 형형한 눈빛으로 남아 이제 새 옷을 입고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가 보았던 제주의 풍경은 이제 많이 달라졌지만 그가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여, 우리의 허상을 날카롭게 찌른다.
정군칠 시인은 제주 중문 출생으로 1998년 《현대시》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제주작가회의 회원. 제1회 서귀포문학상 수상. 시집 『수목한계선』, 『물집』, 유고선집 『빈 방』이 있다. 2012년 7월 8일 별세했다.
한그루 刊 10,000원
서늘한 정신
천 길 물길을 따라온 바람이 서느러워
바닷가에 나와 보네
앙상한 어깨뼈를 툭 치는 바람은
저 백두대간의 구릉을 에돌아
푸른 힘 간직한 탄화목을 쓰다듬고
회색잎 깔깔거리는 이깔나무 숲을 지나
황해벌판을 떠메고 온 전령이려니
지난날, 그대
비 갈기는 날의 피뢰침처럼 시퍼렇게 날이 서서는
혀를 감춘 하늘을 물어뜯어
만경들의 물꼬들을 차례차례 깨우고
나지막한 산맥을 넘을 때
누렁쇠 쇠울음으로 회오리도 쳤을 터
그대 지나는 풀밭
풀자락들은 흔들려 불꽃으로 일고
그 불길이 몰려오는 섬 기슭에서
나 오늘, 서늘한 정신 하나를 보네
꽃의 장례
나는 매일 아침 소망장의사 앞을 지난다 비문이 덜 새겨진 비석들이 누워 있고 그 옆으로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동자상이 드문드문 서 있다 고갯길을 막 넘어온 자동차가 왕벚나무 가로수 아래에서 가래처럼 채 연소되지 않은 가솔린을 가륵가륵 밭아낸다 검은 길 위에 흩어진 벚꽃잎, 무리 지어 4월의 길을 건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동자상의 눈빛 속에 자동차들이 느릿느릿 지나간다 제 가는 길에 자신이 만장이 되어버린 꽃잎들. 만장 사이로 체취마저 다 잊은 아비 같기도, 어미 같기도 한 얼굴들이 아른거린다 평생 어깻죽지 한번 펴보지 못하던 생애 위로 하얀 나비떼가 날개를 살랑거리며 날아 오른다 하얀 나비가 날아가는 길, 누군가의 생애가 다시 시작되고 자동차의 백미러에 비치는 그 길이 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