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승립 시인이 노래하는 사랑은, 어떤 때는 개인의 실존 차원에서 그리고 어떤 때는 구체적 대상에 대한 감정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그만큼 시인이 사랑의 기운에 휩싸여 있다는 실증이기도 하면서, 시적으로는 ‘사랑’에 대한 변주와 깊이를 향하는 반복으로 읽어야 마땅하다. 왜냐면 김승립 시인은 구체적 개인의 정서 상태인 사랑과 현실에 대한 역사적/윤리적 태도로써의 사랑을 일치시키려고 하기 때문이다.
김승립 시인은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살고 있다.’ 이 시집의 3부와 4부는 제주라는 공간과 제주의 역사를 통한 시 쓰기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앞에서 시인이 ‘사랑의 힘으로’ 시를 쓴다고 말했듯이, 제주의 시공간에만 머물지 않는 시인의 시각을 독자들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제주의 역사와 제주라는 공간에 대한 시편들에서도 변함없는 ‘사랑의 힘’을 발견할 수 있다.
김대현 문학평론가는 “김승립 시인은 벌레의 눈으로 사랑을 이야기하는 시인이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사랑은 다정하고 부드러운 사랑만은 아니다. 자신의 몸을 내어 타인에게 밥을 먹이는 사랑, 찢기고 피흘리는 타인의 고통을 눈물을 흘리며 기록하는 사랑이 시인의 사랑이다” 며 “‘산들바람’이 불어오면 언제라도 ‘산들바람’이 될 수 있는 ‘유연한 몸짓’을 가지지 못한 그는 힘의 중심에 포획되지 않은 채 마지막까지 ‘반국민’(「어떤 이력」)으로 남는다.고 밝혔다.
[작품 감상]
들녘, 아직 추위 강파른데
어디선가 벌레 한 마리
움 열고 대가리를 내민다
칼바람조차 아무렇지 않은 듯
한 줌 온기의 작은 몸짓으로
꽝꽝 언 땅을 씩씩 밀어낸다
저 무모함!
오랜 잠에 묶여 있던 어린 풀씨들
한 마리 벌레의 대책 없는 꼼지락거림에
간지럼 타며 아아아 기지개 켠다
온 세상이 그만 봄빛으로 가득하다
나, 그대에게 벌레 한 마리의
온기를 전해주고 싶다
지구를 온통 파랗게 뒤흔들어놓는
무모한, 썩지 않는 사랑을
_「한 마리 벌레의 시」 전문
가령, 네 눈물 같은 거
삶이 버거울 때, 입술 깨물다가
간신히 방울방울 맺히는
보석 같은 거
사랑해본 일이 있는가
가령, 네 콧등의 뾰루지 같은 거
예고 없이 불현듯 돋아
귀찮게 삶을 간질이는
확증(確證) 같은 거
사랑해본 일이 있는가
꽃은 외려 바람의 시샘으로 피어나는 법
언뜻 흐리다 개고
다시 흐려지는
네 마음의 풍경
사랑해본 일이 있는가
뜨락에 비 듣고
꽃잎 파르르 떨릴 때
비로소 꽃잎으로 눈뜨는
네 순결한 성(性)의 깊이
_「존재의 이유」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