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49재 뒤 총선 출마 여부 발표”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바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타계한 지도 한 달이 지났다.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한 이는 아내이자 오랜 정치적 동지로 33년을 동고동락한 인재근씨(59·한반도재단 여성위원장·사랑의친구들 운영위원장·사진)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49재를 보름 앞둔 지난 1일 광화문 한반도재단 사무실에서 인씨를 만났다. 그는 “아직도 남편이 떠났다는 실감이 안 든다”고 했다. 생전 남편이 쓴 책이나 글을 읽으면서 그의 생각과 다시 만나고 있다고 근황을 밝혔다.
요즘 인씨를 둘러싼 세간의 관심사는 오는 4월 총선에 김근태의 지역구인 서울 도봉갑에 그가 출마하느냐 여부다. 민주통합당은 물론 시민사회 인사들의 출마 요구가 잇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상중이어서 공식적 선언이나 발표는 49재인 16일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라며 “남편의 마지막 유지가 ‘2012년을 점령하라’인 만큼 뭔가 역할은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것이 현실정치 참여가 될지 다른 사회운동이 될지는 좀 더 고민하겠다”고 덧붙였다.
그동안 김근태의 그늘에 가려진 측면이 있지만 인씨의 민주화운동가로서 삶의 궤적 또한 뚜렷하다. 그에게 붙은 ‘김근태의 바깥사람’ ‘김근태의 비밀병기’라는 별칭은 그냥 붙은 게 아니다. 그는 고교시절까진 소위 ‘범생’이었다. 1973년 이화여대 사회과학계열에 입학한 후 이념서클 ‘새얼’에 가입하면서 인생의 항로가 바뀌었다. 민주통합당 최영희·이미경 의원과 장하진 전 여성가족부 장관 등이 ‘새얼’ 선배들이었다. 그는 1학년 때부터 여름방학 땐 농활을 하고, 겨울방학 땐 구로공단에서 일하거나 중랑천 빈민판자촌에서 야학을 꾸렸다. 그때 노동운동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졸업 후 인천 부평의 봉제공장에 위장취업했다. 김근태를 처음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주선자는 최영희 의원과 노동문제 이론가인 장명국 내일신문 사장 부부다.
“최영희 선배는 당시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의 노동자 상담 실무자였어요. 최 선배는 ‘너의 신랑감은 따로 점찍어둔 사람이 있으니 연애하지 말라’고 제게 입버릇처럼 말했죠. 그의 삼청동 집에도 자주 놀러 갔었는데 1977년 말 그 집에서 남편과 처음 마주쳤어요. 바로 선배가 말한 제 신랑감이었죠. 당시 저는 동일방직사건에 연루돼 수배 중이었고, 남편은 서울대 오둘둘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이미 1975년부터 수배상태였어요. 오랜 수배생활 탓인지 남편의 인상은 우울해보였죠. 하지만 김근태씨가 저를 너무 좋아하니까 측은지심이 생기더라고요(웃음).”
두 사람은 만난 지 6개월 후부터 부모 허락하에 경기도 부천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김근태는 인씨가 행여 다른 남자에게 시집갈까봐 “전전긍긍했다(웃음)”고 한다. 첫아들 병준이 태어나기 두 달 전인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과 함께 수배가 해제되었고 두 사람은 이듬해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병준을 낳았을 때부터 남편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의장이 되어 1985년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조종 혐의로 구속되기 전까지를 가장 행복한 기간이라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남편이 살아있어서 따뜻한 체온을 느낄 수 있었던 모든 시간들이 행복한 시간이었어요.”(인씨는 말끝에 눈물을 훔쳤다)
김근태는 1985년 9월4일부터 26일까지 23일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8번의 전기고문, 2번의 물고문을 당했다. 인씨는 “남편의 고문 사실을 알았을 때와 돌아가시기 하루 전 남편이 위독하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들었을 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인씨의 민주화투쟁사에서 1985년 12월 양심수 후원단체인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창립은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이다.
“남편이 고문당한 것을 폭로하고 기독교회관 인권위에서 장기농성을 하는 과정에서 구속 학생이나 노동자들의 가족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됐어요. 당시만 해도 학생가족, 노동자가족, 전태일유가족, 장기수가족협의회 등이 각각 소규모 단체로 있었어요. 이것을 하나의 협의체로 묶어야겠다고 판단해 민가협을 만든 거예요. 그 어머니들이 1987년 6월항쟁의 주역이 됐죠.”
한 달에 한 번씩 병준·병민 남매를 데리고 수감된 남편을 만나러 갈 때는 꼭 특별면회를 신청했다. 교도소 이감 때마다 인씨는 교도소 측과 그 요구사항부터 협상했다. 아버지와 아이들이 서로 안으며 교감을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자식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김근태는 그날만큼은 유난히 깨끗한 몸가짐으로 나왔다고 한다. 손에는 아이들에게 주려고 교도소 안에서 산 과자와 딸기우유가 늘 들려 있었다. 인씨는 “다행히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고, 교도소에 면회가는 날을 소풍가는 날처럼 여겼다”고 회고했다.
보통의 여자라면 감당할 수 없었던 모진 세월을 인씨는 의연하게 감내했다. 정치적 신념이 없었다면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90년대엔 서울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주변엔 늘 사람들이 꼬였다. ‘남다른 친화력과 대장리더십’. 인씨를 지척에서 봐온 이들의 공통된 평가다. 그래서인지 그는 30대부터 총선 출마를 비롯해 현실정치에 참여하라는 제안을 늘상 받았다. 그는 그때마다 거절했다. 그는 “남편은 마음이 몹시 곱고 착한 사람이어서 내가 정치를 하면 나를 도와준다고 자기 일을 못했을 것”이라며 “실제로 남편은 내가 자신의 능력을 정치적으로 만개시키지 못하는 것을 늘 아까워했다”고 말했다.
인씨는 남편이 궁극적으로 꿈꾼 사회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 사회’라고 말했다. 남편이 마지막으로 남긴 ‘2012년을 점령하라’는 말은 그런 사회로 가기 위한 다리라고 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서 사회 양극화는 더 심해지고 천신만고 끝에 이뤄놓은 남북관계는 경색됐어요. 우리 국민은 정말 중요한 시기에 대통령을 잘못 뽑았다고 생각해요. 모든 것을 뒤로 돌려놨잖아요. 총선과 대선이 있는 2012년이 기회예요. 남편은 모두가 참여해 권력을 바꿔야 하고 그 권력이 역사를 바꿀 것이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긴 거예요. 정치를 올바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출마하고, 유권자는 투표를 해야죠. 남편은 평소 제게 우리가 통일을 앞당기고, 우리 국민 대다수가 주거, 의료 등에서 소외되지 않는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데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어요.”
인씨는 남편의 뒤를 이어 한반도재단 이사장직을 맡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이번 총선에 출마 뜻은 있는지, 만약 출마해 당선된다면 어떤 정치를 펴고 싶은지 물었다. 그는 “김근태의 뜻, 청렴함, 근면함을 이어가겠다. 스스로 맑은 물이 되어 현재의 흙탕물과 같은 정치판을 바꾸겠다. 그리고 더 많은 여성들이 제도권 정치에 진출할 수 있는 장치 마련에 힘을 쏟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