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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좋은 시집․시조집 및 좋은 시․좋은 시조 선정
올해의 좋은 시집․시조집 및 좋은 시․좋은 시조 선정
  • 양대영 기자
  • 승인 2012.01.20 18: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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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발간되는 계간문예 '다층', 2011겨울호 에서 선정

 

제주에서 발간되는 계간문예 다층(주간 변종태)은 2011년 겨울호(2012년 1월 1일 발간)에서 새로운 기획을 시도하였다.

그것은 2011년 한 해의 시단과 시조단을 아우르는, 올해의 좋은 시(조)집 BEST 2와 좋은 시(조) BEST 10을 뽑은 것이었다.

이에 대해 다층은, 우리 시단에는 1만 여명이 넘는 시인들이 활동하고 있고, 문예지만 해도 300종이 넘어 독자들이 이 모든 시인들의 발표시를 일일이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단하고, 워낙 다양한 시인들이 다양한 시를 발표하고 있지만 좋은 시를 보는 눈은 독자들마다 다르다면서, 몇몇 출판사에서 좋은 시를 선정하고, 그 결과를 단행본으로 엮고는 있지만, 이 또한 정확히 좋은 시를 다 포괄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다층은 2010년 겨울호부터 2011년 가을호까지 발표된 월간 및 계간 문예지에 발표된 시들을 대상으로 올해의 좋은 시와 시조 및 시집과 시조집을 선정했는데, 시와 시조 각 30여 명의 추천위원들로부터 1인당 시(조) 10편, 시(조)집 2권을 추천 받고, 본심위원들의 심의를 거쳐 최종 선정하였다.

그 결과 올해의 좋은 시집에 조용미 시인의 시집 「기억의 행성」(문학과지성사)과 김영미 시인의 시집 「두부」(시와사상사)가, 좋은 시에는 강인한, 복효근, 이 원, 강미정, 최금진, 박해람, 권성훈, 이혜미, 김 륭, 임재정(이상 등단순) 시인이 선정되었고, 올해의 좋은 시조집에는 이승은 시인의 「꽃밥」(고요아침), 박명숙 시인의 「은빛 소나기」(책만드는집)가, 좋은 시조로는 유재영, 민병도, 박기섭, 이지엽, 이정환, 신필영, 박옥위, 정수자, 박현덕, 서숙희, 문순자, 김동인(이상 등단순) 시인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시조의 경우 12인의 시인이 선정된 것은, 추천위원들의 추천을 집계한 결과 다득표 순으로 선정하다보니, 동점자가 세 명의 시조시인인 까닭이다.

한편, <다층>은 지난 2012년 1월 일, 영주신춘문예 시상식 자리에서 올해의 좋은 시조집과 시조에 선정된 시조시인들에게 기념패 전달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이승은, 박명숙, 이정환, 신필영, 박옥위, 박현덕, 서숙희, 문순자, 김동인 시인이 참석해서 인간중심 인터넷신문「나는기자다」와 인터넷「제주매일신문」이 공동 주최한 제5회 영주신춘문예 당선자들을 축하하고 격려했다.

<다층>에서 소개한 올해의 좋은 시집 및 시조집에 실린 대표시와 올해의 좋은 시 및 시조에 선정된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올해의 좋은 시집>

 

계간문예 <다층> 선정, 올해의 좋은 시집

조용미 시집 「기억의 행성」(문학과지성사)
김영미 시집 「두부」(시와사상사)

계간문예 <다층> 선정, 올해의 좋은 시
강인한 강변북로
복효근 새들의 행로
이   원 그리고 바다 끝에서부터 물이 들어온다
강미정 저녁
최금진 루저
박해람 운지법
권성훈 유씨의 목공소
이혜미 어둠이라는 짐승
김   륭 사마귀
임재정 발림; 장마 中의 빗소리 전체

 

<좋은 시집 수록 대표시>
 

메밀꽃이 인다는 말

조용미

메밀꽃이 인다는 말 아는지요
바닷가 사람들의 오랜 말로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을 어부들은 메밀꽃이라 부릅니다
흰 거품을 일으키는 물보라를 메밀꽃이 인다 하는데
그 꽃은 피는 게 아니라 이는 거예요
피는 꽃이 스러지는 꽃을 알 수 있을까요 지는 꽃이 일어나는 꽃을 숨 쉴 수 있을까요

먼 파도에서 일어나는 물거품을 나도 이 순간부터 메밀꽃이라 부르기로 합니다

잠에서 일어나고 연기가 일어나는,
먼지가 일어나고 두통이 일어나는,
아지랑이가 일어나고 혁명이 일어나는,
산불이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나는,
불꽃이 일어나고 모래바람이 일어나는

일어나고 일어나 스러지고 또 스러져 다시 일어나는
그 꽃을 당신은 벌써 알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마음이 일어난다는 말은 어떤가요
메밀꽃처럼 흰 거품을 일으키며 솟구쳤다 스러지고 또 스러지는 이 마음 참 오래되었지요
메밀꽃이 또 인다고 당신께 소식 전하지는 못합니다
그저 메밀꽃이 피고 졌다 말할 밖에요
북쪽으로, 매서운 메밀꽃이 이는 한겨울의 바다로 가만히 당신을 보러갑니다

 
두부

김영미

1.
그러니까 상고시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총인구수를 알고 싶다면 두부를 먹어본 사람의 수를 세면 되리라

2.
여기에 두부가 있다
무색무취에다 자의식이 없는 두부는 돼지비계에 붙고 김치에 붙고 쓸개와도 어울린다 어떤 맛도 주장하지 않는 두부는 모든 맛과 거리를 두고 있어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는다 두부는 그냥 두부일 뿐, 아마도 중용이란 낱말에 혀를 대어보면 십중팔구 두부맛이 나리라 네모였다가 네모가 아니다가 형이 으깨져 동그랑땡이 되어도 그대로 무아무상이다 반야심경을 푹 우려낸 물에 간수를 넣어 굳힌다면 아마 두부가 되리라

3.
두부쯤이야
단숨에 짓뭉개버릴 수도, 심장 깊숙이 칼을 꽂을 수도, 나는 두부 앞에서 당당하다 젓가락으로 모서리 한 점을 건드려 본다 기다렸다는 듯 두부는 스스로 제 살점을 뭉툭 떼어 젓가락 쪽으로 옮겨 앉는다 칼로 잘라본다 칼이 닿자마자 두부는 온몸으로 칼을 받아들여 칼의 길이 되어버린다 큰 육모, 작은 육모, 조각이 난 두부 어디에서도 칼의 흔적, 칼의 상처를 느낄 수 없다 어느 칼잡이가 칼을 받아내는 솜씨가 이러할까 고수 중에 상고수다

4.
온두부에다
연두부
연두부에다 순두부
두부는 연하고 순하다 따뜻하고 착하다 그래, 두부야, 그래서 두부야 그러니까 두부여 무엇이라고 이 두부놈아 아이구 두부님 어이구 두부시여 이제, 나의 화두는 두부이다

<2011 올해의 좋은 시 BEST 10>

강변북로
 
강인한

내 가슴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달이 지나갔다.
강물을 일으켜 붓을 세운
저 달의 운필은 한 생을 적시고도 남으리.
 
이따금 새들이 떼 지어 강을 물고 날다가
힘에 부치고 꽃노을에 눈이 부셔
떨구고 갈 때가 많았다.
 
그리고 밤이면
검은 강은 입을 다물고 흘렀다.
강물이 달아나지 못하게
밤새껏 가로등이 금빛 못을 총총히 박았는데
 
부하의 총에 죽은 깡마른 군인이, 일찍이
이 강변에서 미소 지으며 쌍안경으로 쳐다보았느니
색색의 비행운이 얼크러지는 고공의 에어쇼,
강 하나를 정복하는 건 한 나라를 손에 쥐는 일.
 
그 더러운 허공을 아는지
슬몃슬몃 소름을 털며 나는 새떼들.
 
나는 그 강을 데려와 베란다 의자에 앉히고
술 한 잔 나누며
상한 비늘을 털어주고 싶었다.

- <유심> 2011년 5~6월호

새들의 행로

복효근

땅에서 태어났으나 어중간한 허공에 집을 짓고
하늘을 사랑하느라
땅을 돌보지 못했으므로 늘 풍찬노숙이었지
이제 하늘의 근원인 땅 속 일이 궁금했을까
상추쌈으로 점심 식사를 마치고 뒤꼍에 갔다가 죽은 새를 보았다
새도 죽는구나
죽어 땅으로 돌아오는구나
천국까지 내왕하는 듯한 자유 부러웠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어; 불쌍하다니 겨우 땅위를 기어댕기는 주제에
새를 묻어주려 땅을 팠다
반쯤 감긴 새의 눈엔 어느새 파리 몇 마리 날아들고
흩어진 깃털 사이에는 민들레 씨앗이 달라붙어 있었다
몸을 바꾸고 있었다
새는 제가 죽은 줄도 모르고 노래하며 날고 있다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일을 내일 또 내일의 해가 뜰 것이다
내가 먹은 상추는 몇 만 년전 어느 새의 깃털이었을까
민들레는 새가 되어 뿌리 내리고
파리는 새가 되어 꽃 필 것이다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데 나만 습관적으로 불편하다
죽은 새가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려워, 혹은 학습된 슬픔 때문에 서둘러 나는 새를 묻었지만
단언컨대 나는 쓸 데 없이 이들의 역사에 간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 상관 없이
6월이다 곧 여름이 올 것이다

- <문학청춘> 2011년 봄호

그리고 바다 끝에서부터 물이 들어온다

이 원

팔월과 시월 사이 사과가 익는다 접시 위에 칼을 놓는다
창에 얼굴이 반만 나타난다

바다와 나란히 비행기가 지나간다
허공은 목구멍을 사과 속에 벗어 두고 나온다
유방들의 둘레가 헐렁해진다 팔월과 시월 사이 사과가 익어 가면서

빛을 빠져나온 것들은 모두 칼질이 되어 있다
칼은 너무 오래 찌르고 있다 아는 얼굴이라고 했다

비탈에는 붉어지는 사과가 주렁주렁하다
덜 익은 사과가 기억으로부터 뚝 떨어진다
허공에는 벌어진 입

아래를 열면 그곳에 산 채로 아이들이 들어 있다
아이들은 허공에서 나오지 않는다 바람이 아이들을 보기 좋게
결대로 자르는 것은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는 그때

사과가 또 하나 툭 떨어진다

- <문장웹진> 2011년 11월호

저녁

강미정

자귀나무가 다소곳이 잎을 모으고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뜨거움 정도는 서너 번 삼킬 줄도 아는 사람처럼
살풋, 고개를 숙이고 저녁을 맞이하는 것을 보았다

어둠살이 번지는 오래된 골목에서 아이를 불러들이는 둥근 목소리처럼
짓무른 저녁 쪽에 더 깊은 뿌리를 박아 눈이 어두워질 때까지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오래오래 살고 있는 것 같은,

눈가의 붉은 자리는 애써 피해서 지나가는 듯
낮은 숨소리 같은 볼그레한 자귀꽃이 조금 흔들렸다

공손히 해가 서쪽으로 지고나면 나에게도 둥근 목소리의 저녁이 와서
내가 불러들여야 하는 산초열매같은 새까만 눈의 아이들과
나를 흔들며 내 마음 깊이 뿌리를 내린 당신의 사랑,
서로가 서로에게 짓무른 저녁이 와도 다다를 수 없는 가파름이 있고
수많은 갈래로 몸을 바꾸며 지나는 흔들림이 있다

자귀나무 잎처럼 다소곳이 손을 모으고 볼그레한 자귀꽃
흔들리는 어둠살이 번져 와도 끝내 당신에게로 완전히 되돌아 갈 수 없는
잔잔한 흔들림과 떨림은 내 가슴에 남아 있다

- <다층> 2011년 가을호
 

루저(Loser)

최금진

일류는 아니고 이류는 된다고 믿어봤자 지방대학을 나왔고
위대한 업적 따윈 바라지도 않는다고 큰소리쳐 봤자
어차피 위대할 수 없다, 그건 출세한 가문의 자제들 몫
소주를 먹고 취해 원룸으로 돌아가는 길
왜 취했는지, 왜 그토록 화를 냈는지는 호적등본에 안 나온다
백짓장도 맞들면 인건비만 나가니까 결혼은 못하고
연속극을 보다가 여주인공이나 생각하며 잠든다
아침마다 변비를 앓으며 읽는 신문은 언제나 남의 일
돈 많고 잘 생긴 사람들은 양복을 입고, 고급 승용차를 몰고
신문 톱기사에 등장하여 함부로 꿈꾸지 말라고 훈계한다
출근길과 퇴근길엔 일부러 천천히 걷는다
걷는 건 경범죄가 아니지 않습니까
도둑고양이 같은 사내들이 고시원마다 그득하게 박혀
안 보이는 바깥 유리창에 뭐라고 낙서를 할 때
누구나 그 얼굴을 향해 돌을 실컷 던져도 좋다, 여긴 민주국가고
적어도 실컷 두들겨 맞을 자유쯤은 있지 않겠습니까
상류층은 아니지만 중산층은 된다고 믿어봤자
이 바닥에서 한걸음에 뛰어올라가야 할
지하도의 계단은 저렇게 많고
아침이면 또 지각을 할 것이다
매번 늦도록 시계가 잘못 맞추어진 게 아니라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지하철은 달리는데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고 싶다, 흠씬 두들겨 맞았으면 좋겠다
스테이크 다진 고기처럼 바닥에 눌어붙는
일요일이면 교회에 가서 목이 터져라 찬송을 부른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믿어봤자 다, 다, 소용없다
 
- <시안> 2011년 여름호

운지법

박해람

울음의 밖에 혼자 서있는 흐느낌을 본 적이 있다 한참동안 울음을 달래던 그 흐느낌
 
울음을 틀어막는데 몇 채의 구름보기를 사용했다
손가락에서 나올 수 있는 말들이란 뻔히 알고 있는 것들이지만 열개의 손가락을 다
버릴 수가 엇다
구멍을 피해 다녔던 곳마다 후렴이다
물오른 나뭇가지가 아닌 긴 막대기를 들고 팔 아픈 곡을 연주하는 지경에 이르러 
줄기들마다 생장점이 만져지는
가두어 놓고 있던 소리들이 튀어나와 음역을 찾아가다
 
물은 돌 사이에 고이고
꽃그림자는 물에 고이는 것이라는데
돌에 물과 꽃이 같이 고인 일
얼굴을 비추는 수면에 얼굴을 떨어져 흐려지는 물
 
머리를 숙였던 예의가 훗날 맹인이 되었다지
녹기 좋아하는 향기는 흰 눈과 섞여 눈송이로 날리고 있을 뿐 누가 짚어보고
간 구멍들인지 바람만 가득 들어 있다
 
가지마다 붉은 지점을 만들어 놓고
건너가는 개화의 순간들 짧은 단소 한 자루에 뱀과 같은 음역이 들어 있을 줄이야
 
갇힌 소리가 내는 음
가늘고 긴 봄날을 울리는 저 운지법은 사실
호흡법이다
어쩌다 기다란 음역에 들어 손끝을 맛본 소리들
쌍꺼풀 없는 음계엔 모래소리만 난다 

- <주변인과 시> 2011년 봄호

유씨의 목공소

권성훈

자음과 모음에 톱질을 시작 했어
비명이 새어 나가지 않게
욕조에 1492 콜럼부스를 틀어놓고 등단 해
ㄱ자로 ㄴㄷㄹ ㅁㅂ ㅅ 목젖에서 꿈틀거리는 ㅇㅈ ㅊㅋ 혀를 막고 ㅌ ㅍ ㅎ 닿소리를 열네 토막 내는 거야
저항하다 둔기 맞은 자음의 입 안에
고여 있던 구절이 흘러나와 바닥에 닿으면
한꺼번에 잘려나간 모음의 내장이 터질 것 같아
ㅏㅑ하며 눈물짓는 받침을 ㅓㅕ 떼어낸
실밥 풀린 홀소리가 엎치락뒤치락
ㅗ ㅛ것 봐 언어의 살갗에 붙어 있다
켜켜이 떨어지는 나뭇잎의 잔말들
자꾸 의문을 던지는 것 같아
지워진 기억조차 차례로 지워야 했어
나이테의 ㅜ ㅠ 빛깔만 그루터기로 남을 때 까지
연쇄로 쏟아지는 풍문을 대패질 하는 거야
어제 파 묻혔던 새벽이 삐걱 문을 열고 들어와
동강 난 음절로 절절하게 이슬 맺힌 어둠
헐렁해진 마지막* 가는, 문신을 ㅡ ㅣ새겨 넣을 줄이야
얼굴 없는 어근을 못질하는 유씨의 목공소에
관절 빠진 몸시(肉詩) 한 그루 널브러져 있다지.
* 연쇄살인범 유영철의 시 제목

- <다층> 2011년 여름호

어둠이라는 짐승

이혜미

그는 이 짐승을 믿을 수 없어 했다.

불확실한 털과 뭉툭한 잇몸을 지닌
이쪽에서 저 너머를 향해 몰려가는 흐린 짐승 때.
그들이 쏟아놓고 간 그늘을 오래 들여다보면
몸이 지워지고 한쪽 얼굴이 내려앉았다.

그는 빛을 뒤집어서 꿰매는 사람
오므려진 매듭 끝에 맺히는
뜻밖의 무늬들이 아름다워
그에게 다가가 키스한다.

밤이 우리의 눈꺼풀 안쪽을 물어뜯는 동안
발 밑 가득 쏟아져 내리는 달의 내벽(內壁)

서로의 어두운 입술을 나누며
나는 그의 몸속으로 환하게 흐르는
백야(白夜)를 상상한다

내피가 뒤집혀 안이 바깥이 된다면
인간의 몸은 우주를 담을 수 있다*

눈먼 그를 안고 함께 눈을 감으면
우주의 주변을 서성거리던 짐승들의 발자국이
그에게로 깃드는 것이 보였다.

*조지 가모프

- <딩아돌하> 2011년 여름호

사마귀

김 륭

내 입술을 버리고 당신 입술을 가졌다

눈앞에 펼쳐져있던 모든 길을 먹어치웠다 교미 후 수컷의 머리를 씹는 암컷 사마귀처럼 그렇게 나는 당신에게 못 다한 사랑을 전해드리고자 했지만, 당신의 입술이 내 몸을 꿰매기 시작했다

노랗게 샛노랗게 당신의 입술로 나를 흘리고 간다 힘껏 부풀린 사타구니 밑으로 나풀나풀 나비의 길이 생겼지만 나는, 나비를 읽을 줄만 알았지 쓸 줄을 몰랐다

태어나 좋은 꿈 한번 꾸지 못하고 간다 그러니까 나는 저만치 내 무덤 속에서 팔다리를 꺼내는데 꼬박 사십 년이 걸렸다고, 당신의 어깨 위에 부서진 머리 하나 기우뚱 달처럼 얹어놓고 간다

혀를 뽑아낸 자리에 애기똥풀 피었다

- <시와사상> 2011년 가을호

발림; 장마 中의 빗소리 전체

임재정

어디까지빗방울인지, 나는

쏟아지는 바는 시원하고 얼큰한 맛. 집에 딸린 흉이란 흉은 다 아는 허풍선이 옥상과 삼겹살에 소주잔을 맞놓고 어찌어찌 말문을 터서. 문짝 걷어차며 들이친 빚쟁이에 쫒기는 나를 옥상은 온몸으로 덥석 받아주었을 터. 장마는 일주를 열 사날로 늘려놓고 친애하는 옥상에 빚 독촉하며 한껏 윽박지를 때

그럼요, 갚아야죠 빚. 방수층 가득 빗방울에 시퍼런 옥상은 내가 허울 쓴 얼굴의 찡그린 한때라서. 참 지독쿠나 변비 어쩌고 하며 오랜만에 빚 갚을 셈. 험! 큰기침도 섞으며 물 빠짐이 영 시원찮구만, 고인 물에 얼굴 반쯤 담근 채 홈통 깊이 팔 뻗어 가랑잎이나 좋이 건져내는 판. 그러나 옥상 넙데데한 얼굴 가득 합! 합! 합! 합! 뛰어내린 속도로 튕겨 오르는 빗방울의 짓거리가 얼마나 근사하던지. 어쩌다가 나는 이미 옥상이란 데에 기꺼이 뿌리박은 자인데

나의 어디까지인지, 옥상은

- <열린시학> 2011년 가을호

<올해의 좋은 시집>

 

<좋은 시조집 수록 대표시조>

놓친 길

이승은

더불어 걸어왔던 순한 길이 사라졌다

문 밖 늘 궁금해도 섬뜩해진 나의 외출

행방을 놓친 길들이 실핏줄에 얽혀 있다

길에 치인 자국마다 꽃잎은 시들어가고

그때부터 몸 어딘가 간이역이 들어섰다

가끔씩 어깨 언저리 시린 까닭 알겠다
 

개상사화

박명숙

초경을 치르는 날

선운 숲은 어둡다

눈썹 긴 처녀들은

혼령보다 서늘한데

도솔천

낭자한 선혈이

세상으로 새고 있다

<계간문예 <다층> 선정, 올해의 좋은 시조집>

이승은 시조집 󰡔꽃밥󰡕(고요아침)
박명숙 시조집 󰡔은빛 소나기󰡕(책만드는집)

<계간문예 <다층> 선정, 올해의 좋은 시조>

유재영 어머니 쌀독
민병도 은하수
박기섭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지엽 의자
이정환 공은 늘 멀리 달아난다
신필영 소금 어머니
박옥위 암각화와 달 2
정수자 꽃답
박현덕 까마귀
서숙희 에밀레, 탁본에 들다
문순자 내 사랑의 수압

유재영 민병도 박기섭 이지엽
이정환 신필영 박옥위 정수자
박현덕 서숙희 문순자 김동인
김동인 자목련

 

어머니 쌀독

유재영

Ⅰ.

그만 됐다, 고단한 하루 일을 끝내고

어둑한 상머리에 둘러앉은 식구들

외양간 워낭 소리도 권속眷屬 같던 그날 밤

Ⅱ.

임진년 가뭄에도 갑오년 홍수에도

시린 어깨 추스르며 한 가문을 지켰느니

이 나라 그릇 중에도 제일 큰 어른이여

Ⅲ.

언제나 못 다 채운 우리 집 쌀독처럼

6대 종부 가슴 조인 일생도 그러셨다

오늘은 어머니 휘일諱日 받쳐 든 메 한 그릇

- <유심> 2011년 5~6월호

은하수

민병도

북만주
홀로 갇힌
마른 울음
들리는 밤

신발을 벗어들고
새벽 하늘 걷노라면

대꽃 핀
마을로 갔나
뼈가 허연
발자국…

- <현대시학> 10월호

우두커니 서 있었다
- 黑柹牒

박기섭

늙은 감나무는 어디서나 그렇습니다

그 풋감 떫은 것들 단물이 들 때꺼정

참먹을 동이째 갈아서 마시고는 합니다

먹감이 왜 먹감입니까 그래서 먹감입니다

된가을 서릿길에 만등을 내건 날은

말로는 다 못할 것들 그도 실은 먹빛입니다

이승 아니라면 저승 어느 저녁답을

늙은 감나무는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먹감장 먹감문갑을 걸머진 채 서 있습니다

- <현대시학> 2011년 9월호

의자

이지엽

시 쓰는 놈이 왜그걸
딱딱 하다고만 생각하냐
머시냐 거 꽃게 속 연한 속살 안있냐 안
그렇게 부드럽단 마다
밥이 곧 의자 아니든

어디 뒤다닌다고
다 시가 되드냐
시 쓰는 것 결국에는 엉덩이 아니더냐
지그시 눌러 앉아서
주우고 또 묵히고

니 애비도 속창시 읎이
하라는 농사응 않고
탁배기에 막걸리 한잔, 소리도 잘햇어야
이제사 생각해보니
그것도 의자 였어야

엉거주춤 서있지만 말고
거기 풀썩 앉어 봐라
아무리 힘준다고 고것 꼼짝이나 하든?
죽으면 다 소용 읎어야
그 자리가 꽃자리여야

― <월간 에세이>(2011년 11월호)

공은 늘 멀리 달아난다

이정환

1
40밀리그램 흰 공이다 달이다 달빛이다
깔깔, 깔깔거리며 멀리 달아나고 있다
이따금 금 가버리면 곧장 가라앉는 달

달이다 달무리다 두들겨 맞고 싶지 않아
연신 깔깔거리며 구석으로 달아나는 달
쫓다가 밟혀버리면 짓이겨져 우는 달빛

2
공은 늘 네게서 멀리 달아나버린다
밤새 흩뿌려지던 메밀꽃밭 저 달빛
멀뚱한 네 곁을 떠나 홀연 사라져 가듯

- <시조시학> 2011년 여름호

소금 어머니

신필영

간이역 몇 정거장
완행열차 같은 봄날

꽃 피듯
그 꽃 지듯
제 품에 녹아들어

속 넓은 항아리 가득 장맛으로 배어있는

밑간이 짙을수록
음식 맛은 덜하다며

참으로 짜지 않게
그러나 간간하게

말수도 웃음소리도 고명으로 얹던 당신

- <유심> 2011년 7~8월호

암각화와 달 2

박옥위

핵심은
늘 생의
가운데에 은밀히 있고

스스로
중심을 향해 숙여들기
마련이다

빛나는 문명사 이전
암벽서각은
있었다

가슴에 고래울음을 간직한 자만이
고래를 약화기법으로 새겼을 것이다
돌칼에 튀던 생의 불꽃이
심장엔들 아니랴

밀서의 시간들은 언제나 은밀하다
깊은 밤 그믐달빛 몇 오리를 감아쥐고

누군가 탁본을 뜬다
저 푸른

고래의 말

― <열린시학>(2011 가을호)

꽃답

정수자

꽃샘에 더친 상심
하마 또, 깊으신지요

안부가 하, 꽃이네요
살이가 다, 그러하지요

살바람
살 저미는 끝에

잎 세우듯……
꽃 세우듯……

- <유심> 2111년 9~10월호

까마귀

박현덕

버릴 날 걱정하며
출근길에 오른 아침

메마른 도로 위를
활주하는 새가 있다

제 속에 무얼 담았던가
찢긴 상처 역력하다

알맹이는 이미 놓친
검정색 비닐봉지

공중에 떠다니며
까악, 소리 낸다

전생을 짚어보느니
혹여 내가 아닌가를

- <시조21> 2011년 하반기호

에밀레, 탁본에 들다
 
서숙희

푸른 소리의 집에 한지 한 장 올려놓고
말씀을 허락받듯 가만히 먹을 바치면
청동은 검은 박하향을 몸 가득히 머금어

스미듯 번지듯 길을 내는 먹물 위로
점묘화로 피어나는 영락이며 옷자락
꽃구름 자욱이 거느려 홀연한 나부낌이네

살과 뼈 다 녹인 천년을 참은 울음이
또 다른 천년에 들어 두 손을 모으니
서원은 영원에 닿아 세상은 적막이라

말하지 말라 먹물이 검다고 무겁다고
검어서 더 가벼운 저 눈부신 만다라
지금 막 하늘로 오르는
에밀레의, 흰 뒤꿈치

- <시조21> 2011년 하반기호

내 사랑의 수압

문순자

참깨 뒷그루로 양배추를 심었다
이랑이랑 떠먹이는 한 숟갈 흙과 거름
첫 손녀 첫울음소리
막 받아낸 친정 같다

추카추카 추카추카 스프링클러 돌아간다
가을타는 내 사랑도 수압이 낮아졌는지
중산간 밤이 깊어야 제대로 물이 돈다

물 주러 간다, 물 주러 간다
새벽 3시 밭에 간다
젖무덤 더듬어가듯 반딧불이 손전등
아가야, 농촌의 밤이 옹알이로 젖는다

- <유심> 2011년 11월~12월호

자목련
- 2011 연평도

김동인

바닷길 보이는 쪽 수묵을 배경으로

마지막 제 몸내를 다 뿜고 떨어지는

간밤에 시렸던 말들 발등을 덮고 있다

떨어진 꽃잎 위로 번져가는 혈흔처럼

거뭇거뭇 몸서리가 가지 끝을 밀어낸다

하현달 받쳐 든 새벽, 이냥 봄이 가나보다

- <시조세계> 201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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