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 정치학과 76학번인 그는 재학 중 학생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돼 두 차례의 실형을 살았고, 제적과 복교를 거듭하다 1987년에야 졸업장을 받았다.
졸업 후에는 민주통일재야운동연합(민통련),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등 재야 운동권에서 활동하며 6월 항쟁을 주도했고 91년부터 민주당에서 직업 정치인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당시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변인으로 있던 민주당에서 부대변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92년 11월 '이선실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세 번째 구속을 당했고 이듬해 2월 석방됐다.
민주당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 복귀 이후 95년 새천년민주당과 민주당으로 분당됐다. 민주당에 남은 의원들은 민주화와 당 쇄신, 지역주의와 극복, 3김 청산 등을 고민하며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결성했다.
통추에는 김원기, 제정구, 노무현, 김정길, 이철, 유인태, 원혜영 등 전·현직 의원들이 참여했고 김 최고위원은 이 중 막내격이었다. 그는 정치적 스승으로 여기는 노 전 대통령에게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물려받았고, 고(故) 제정구 의원에게는 통합과 상생의 정치를 배웠다.
통추 멤버들은 97년 대선을 앞두고 'DJP연합 참여'와 '한나라당 합류'라는 선택을 놓고 노선을 달리 하게 된다. 3김 청산과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놓고 고민한 끝에 내린 판단은 각자 달랐다. 김 최고위원은 제정구 의원과 함께 한나라당행을 택했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김 전 대통령에 대해 "인간적으로는 아버님 같은 분인데 정치적으로는 끝까지 따를 수 없었던, 그래서 김대중 총재만 생각하면 늘 회한에 젖는다"고 말했다.
그는 제정구 의원의 경기 군포 지역구를 물려받아 2000년 16대 총선에서 당선됐다. 한나라당에서 이부영, 김홍신, 김영춘 의원 등과 함께 소장개혁파로 활동하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하고 대북송금특검법안에 반대하다 당내 보수파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참여정부가 출범한 뒤에는 열린우리당에 합류, 군포에서 내리 3선을 했다. 원내 수석부대표, 교과위원장 등을 지내며 야권 중진 정치인으로 성장했지만 한나라당에서는 정치적 성향 차이로, 민주당에서는 TK·한나라당 출신이라는 이유로 비주류의 길을 걸었다.
재야 시절 강경파로 활동했지만 정치권에서는 온건파로 분류됐다. 백봉신사상도 여러차례 수상했다. 정치는 통합과 상생을 목표로 해야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제정구 의원의 가르침 탓이다.
김 최고위원은 이번 경선에서 '정당 혁명'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고, 야권의 사지(死地)나 나름없는 대구 출마를 선언하는 등 의지의 승부사로 거듭나게 됐다.
▲1958년 경북 상주 출생 ▲경북고 ▲서울대 정치학과 ▲연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간사 ▲국민운동본부 집행위원 ▲진보정치연합 대변인 ▲민주당 부대변인 ▲16대 국회의원 ▲17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의장 비서실장 ▲열린우리당 원내수석부대표 ▲18대 국회의원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원장/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