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찍이 공자는 논어에서 정명(正名)을 말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녀는 자녀다운 상태 즉, 자신의 자리에서 본분을 다하는 것이 정명이라 말했다. 그렇다면 본분을 다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편견과 사사로움이 스스로의 방향성을 흔들지 못하도록 경계하는 것은 아닐까?
폭행에 이어 살인까지 연이어 발생한 중국인 범죄로 도민사회가 술렁이고 있다. 매우 잘못된 일이고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의 공분이 오롯이 분노 그 자체여서는 곤란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분노는 선량한 다수를 편견 속으로 몰아넣고, 일상의 정명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가 닭 강정이 먹고 싶다고 하여 사러 간적이 있다. 주문을 마치고 기다리는 사이 모녀지간으로 보이는 중국인 두 명이 중국어로 주문을 하려했다. 그러자 주인이 하는 말이, “아 짱개들 괜히 왕 귀찮게 하네, 저 옆집이 강 짬뽕이나 먹으라” 투박한 말투로 이렇게 말하고는 양념을 버무리는 자신의 일에 열중한다. 중국인들이 순서가 안됐다는 말로 듣고 가게 내부에 앉으려고 하자, 손사래를 치며 “야야 거기 못 앉아”하고 고함을 친다. 잠시 눈치를 보던 중국인들은 이내 다른 가게로 발걸음을 돌렸다.
강정을 건네받으며 “아저씨 관광객들인 것 같은데 너무 하신 것 아니에요?”하고 물었더니, “아 자이들 안 됩니다. 뭐 사지도 않고 몰려만 다니고” 하며 미처 추스르지 못한 흥분을 게워낸다. 모녀 지간인지 알 순 없지만 그들은 둘이었다. 그리고 닭 강정을 매우 사고 싶어 했다. 심지어 어머니로 보이는 60대 여성은 다리를 절었다.
만일 그녀들이 모녀지간이고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가 닭 강정을 너무 먹고 싶어 해 딸이 모시고 온 거라면 조악한 편견으로 누구에게나 맛있고 건강한 닭 강정을 판매한다는 자신의 정명을 파괴할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공직자로서의 정명은 무엇일까? 공무원에게 정명이란 편견과 사사로움을 배제하고 올바름을 얻기 위한 부단한 노력은 아닐까? 현재 올바르지 못해도 좋다. 갈망하면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정명과 청렴은 닮아있다. 정명이든 청렴이든 완결이 아닌 과정이다.
겨울에 소나무가 잎사귀를 떨구었다고 소나무의 푸르름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눈이 녹고 칼바람이 잦아들면 소나무가 푸른 계절이 온다는 걸 누구든 알고 있다. 모두가 본분에서 청렴의 푸르름을 꽃 피우는 봄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