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5-06-05 22:22 (목)
[김정일 사망]김정일 연대기
[김정일 사망]김정일 연대기
  • 나는기자다
  • 승인 2011.12.19 16: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년기=1945년 11월 25일, 아버지 김일성의 측근 중 하나인 조명록이 호위하여 어머니 김정숙의 동생 수라(김만한)와 함께 소련으로부터 해상으로 조선의 항구에 상륙 후 청진을 통해 평양으로 이동하여 먼저 귀국한 아버지 밑에 자리를 잡았다. 1946년 여동생 김경희가 태어났고, 1949년에는 어머니를 잃었다. 유년기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한국 전쟁시작 후 1950년 9월 중순, 북조선 군의 형세가 불리하게 되면서 증조, 조부모와 동생과 함께 평양에서 자강도 장강군으로 피난하였고, 유엔군이 북상, 북 중국경 부근에 접근하자, 만포를 통해 중국으로 탈출, 길림시의 한 학교를 통학했다. 1952년 11월 하순,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북조선으로 귀국했다.

◇청소년기=러시아 거주 당시의 동급생에 따르면, 동료와 함께 다양한 학교 행사를 주최하고, 집에서 파티를 여는 등 유년기에 내성적이었으나 점차 성격이 외향적으로 변해갔다고 한다. 평양 제 1 초급 중학교, 남산 고급 중학교 (현재의 평양 제 1 고등 중학교) 졸업 후 1960년 9월 1일에 김일성 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 재학 중인 1961년 7월 22일, 조선 노동당 입당. 1946년 3월 30일 대학을 졸업한 김 정일은 당중앙위원회에서 근무하고 동년 6월 당 조직 지도부 지도원이 된다. 이후 당 중앙위원회 지도원, 과장. 부부장, 부장을 역임하고 1969년 9월 당 조직 지도부 부장에 취임했다. 또 당선전, 선동부 부부장과 문화 예술 부장을 겸임했다. 당시 그는 북조선의 독자적인 주체 사상의 사상정비를 담당한 황장엽을 지지한 적도 있다.

◇권력의 장악= 1972년 10월 제 5기 당 중앙위원회 제 5차 총회해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1973년 9월 제 5기 당 중앙위원회 제 7차 총회헤서 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서기 (당 조직 선전 선동 담당)로 선출되었다. 또한 1974년 2월 13일 조선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 5기 제 8회 총회에서 정치위원회 위원 (현 정치국 의원)에 선출되어 이듬해 2월 14일에는 김일성 후임으로 추대 되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발표되지 않고 김 정일은 '당 중앙'으로만 언급되었다. '당 중앙의 빛'이라는 가곡이 만들어져 김정일 숭배가 시작 되었다. 1980년 10월 10일 제 6차당대회 및 제 6기 당 중앙위원회 제1차 총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위원회 서기국 서기, 중앙 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고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이때 김정일은 처음 공식적으로 국민에 모습을 드러냈다.
1982년 2월 최고 인민회의대위원으로 선출된 이후 오늘까지 대의원을 맡고 있다.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는 이복동생 김평일을 추출, 계모 김성애 사이에 치열한 권력 투쟁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때부터 그가 김일성을 기리는 선전을 강화한 것은 이를 통해 아버지 김일성의 카리스마화와 충성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일로 그는 김일성 파의 독재화에 기여했고 이를통해 당내 고급 정보를 통제하는 것에 대해 힘을 얻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는 그가 젊은 시절 영화국에 근무하면서 아버지 김일성에 대한 카리스마화 선전과 관련된 경험을 활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그는 텔레비전 방송이나 이벤트에 관한 시각적 효과를 현장에서 면밀히 확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육성을 거의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하며, 남북 정상 회담 이전의 육성은 1992년 4월 25일에 열린 조선 인민군 창건 60주년 군사 퍼레이드에서 말한 “영웅적 조선 인민군 장병 여러분에 영광 있으라 !”는 불과 5초의 음성이 유일했다. 그의 권력 세습에 대한 것은 “김정일은 김일성의 아들이라서 후계자가 된 것이 아니라 가장 뛰어난 후계자가 우연히 김일성의 아들이었다”라는 공식적인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김일성 사망 이후 소련에 의해 북조선 정권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이는 소련이 만주파(빨치산파)를 중심으로 한 조선 인민군을 권력 기반으로 삼은 것에 반해 김정일은 당 관료와 행정 관료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으로 행세했다. 따라서 그는 김일성 사망 이전부터 조금씩 조선 인민군을 장악하려고 고심한 흔적이 그의 공식선전 및 인사에서 엿 볼 수가 있다.
또한 그는 외교관 경험자를 상대적으로 중용한 것도 인사 배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소련의 고르바초프시대의 소련과 동유럽 관계와 비슷한 현상이다. 조선 노동당 대회는 1980년 제 6회 대회 이후 소집하고 있지 않다. 김정일은 1991년 12월 24일 조선 인민군 최고 사령관으로 '추대'되어 1993년 4월 9일에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72년에 제정된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사회주의 헌법 (1972년 헌법)에서는 군 통수권은 국가 주석이 조선 인민군 최고 사령관과 국방 위원장을 겸임할 수는 있었지만 헌법을 개정한 후 개정된 1992년 헌법에 의해 군 통수권은 국가 주석에서 국방 위원장에게 위임되었고 이에 따라 공식적으로 김정일은 군 통수권을 장악하였다. 그는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을 당시 국가 원수로 공식적인 발표는 없었으나, 이미 그 이전부터 그는 사실상 최고 지도자로 통치를 시작했다.
1997년 10월 8일 김일성의 사망으로 공석이 되었던 조선 노동당중앙위원회위원장에 추대되어 1998년 9월 최고 인민 회의 제 10기 1차 회의에서 재차 국방위원회 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이 회의에서 국방위원장은 '국가의 최고 직책'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였다.
2000년 6월 햇볕정책을 가지고 김대중 대통령을 평양에서 만나 남북 정상 회담을 했다. 회담 결과 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그 직전 현대그룹에서 정상회담 대가로 북조선에 불법 송금을 했다는 사실이 노무현 정부에 의해 밝혀지기도 했다. 이후 민간 차원의 교루 사업이 본격화하고 일본이나 미국도 국교 정상화 교섭을 준비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남북 정상 회담 후 2001년 이탈리아, 영국. 캐나다 등 서방 국가와 국교를 수립하고 서서히 개발 정책으로 방향을 트는 척 했다.
그러나 2001년 미국의 9.11 사태로 인해 2002년 미국의 부시대통령은 조선. 이란. 이라크 등의 3개국을 테러 지원국으로 지목하였고, 더 나아가 미국은 이들 국가들을'악의 축'이라고 비판하면서 북조선의 적대정책이 국제적인 긴장을 낳게 되었다. 조선은 이제 미국과의 긴장 관계를 완화하는 행동을 하지않고 이른바 '선군정치'를 내걸고 강공으로 치달으면서 협상 결렬과 무력 충돌 등을 통한 ‘벼랑 끝 외교’를 전개하였다.
2002년 9월 17일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는 북한을 방문하여 북일 정상 회담에서 김정일로부터 일본인 13명을 납치했다는 사실을 구두로 전하면서 이에 대한 사과를 받았다고 전한다.그러나 이 일에 대하여 김정일은 “특수 기관 일부 망동 주의자들이 영웅주의에 의해 일어난 일”이라고 해명하면서 , 그는 당시 이 일을 저지른 기관요원들을 모두 처벌하였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 회담에서 두 나라 사이이 현안을 해결하고 국교 정상화에 노력할 것을 담은 '북일 평양 선언'이 발표되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중 김정일은 은밀하게 베이징을 방문하였다. (“stratfor"보도, 2003년 4월 11일지 교도 통신 전송) 그 후 2004년 9월 1일 김정일의 본처 고영희의 사망이 보도 되었다. 그녀는 일본 조총련계의 귀국 사업에서 가족과 함께 북조선에 건너간 재일교포 2세 출신이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김정일 사이의 차남 김정철이가 삼대 후계자로 부상하고 노동당 창건 60주년에 맞춰 후계자로 내정된다는 관측이 나왔다.
당시 일본과 한국의 언론들은 북조선이 최고 지도자의 세습을 관습화하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후계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실제로는 김정일이 후계자가 된 경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습이 그렇게 쉽게 가능한지 여부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과 추측이 있다. 2006년 7월 16일에는 북조선의 미사일 발사를 계기로 유엔 안보리는 만장일치로 이 행위에 대한 비난 결의가 이워졌다.
2006년 7월 23일 김정일이 여성 비서 김옥을 사실상 부인으로 인정하고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이 보도되었다. 그해 미국의 TIME지는 ”2006년 주요인물 26인 중 한 명으로 그를 선정하면서 7월 4일 미사일을 발사하여 미국 백악관에서 열린 부시대통령의 독립 기념일 파티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고 10월에 선정되는 그 해 세계에서 가장 배타적이고 위험한 핵클럽의 수장이 됐다“고 소개했다.
그는 2009년 4월 9일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 위원장에 재임명되면서 그의 3기정권 임기를 맞이하였으며 .같은 달 헌법 개정에 따라 국방위원장은 북조선의 최고 지도자로 추인되었다. 2010년 2월 1일 김정일은 “나는 인민이 아직도 옥수수밥을 먹고 있는 것이 가장 가슴이 아프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가장 훌륭한 이런 인민에게 백미를 먹이고 빵이나 면류를 충분히 먹이는 것”이라는 담화를 노동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다.
2009년 말 단행된 화폐개혁이 실패하고 그 결과로 아사와 치안부대와 논쟁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는 여러 정보가 들어와 있다. 김정일 자신의 건강문제와 관련되어, 지금의 북조선은 '벼랑'에 선 상태라고 분석하는 언론도 있다./뉴시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법인명 : (주)퍼블릭웰
  • 사업자등록번호 : 616-81-58266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남광로 181, 302-104
  • 제호 : 채널제주
  •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제주 아 01047
  • 등록일 : 2013-07-11
  • 창간일 : 2013-07-01
  • 발행인 : 박혜정
  • 편집인 : 강내윤
  • 청소년보호책임자 : 강내윤
  • 대표전화 : 064-713-6991~2
  • 팩스 : 064-713-6993
  • 긴급전화 : 010-7578-7785
  • 채널제주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5 채널제주.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channeljeju.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