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풍경이 아프다
초인 현달환
밥상에
파리 떼들이 삼삼오오三三五五 모여 있다
빈 손바닥으로 내리치니
한 마리는 바동거리고
또 한 마리는 비틀거리고
다른 한 마리는 바로 죽었다
나머지는 다 날아갔다
아얏,
아프다.
내리친 내 손도.

인간은 고뇌의 동물이다. 고등의 동물이 고뇌는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다. 모든 사실에 고뇌하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 스르르 잠이 오면 얼마나 고적하고 한가롭고 여유로울까. 그러지 못하고 고뇌하는 인간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고뇌 속에서 인간은 성장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나’라는 존재로 인해 이루어진다. 내가 없으면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세월에 살고 있는 ‘나’의 존재는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검은 손이다. 내가 존재하는 공간에 서서히 밀물처럼 다가오는 검은 손, 그것은 조직을 갉아먹는 존재이다. 그것을 우리는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우물을 흐린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어쩌면 그것은 변화를 바라는, 현재를 바꾸어보려는 갈망, 염원의 표현은 아닐까? 그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우물을 흙탕물로 만들었지만 그 흙탕물속에서 살고 있는 미약한 존재들은 오히려 박수를 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러한 상황을 우리는 혁신(이노베이션)이라는 말을 쓰고 싶다.
조직은 변화를 바라는 마음과 변화를 바라지 않는 마음, 두 개의 마음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미꾸라지가 흙탕물을 만들기 전의 마음은 변화를 바라지 않는 마음이고 흙탕물을 만든 것은 변화를 바라는 마음의 형태일 것이다.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변화를 바라지 않는 마음보다 변화를 바라는 마음이 앞서서 이제 현대사회까지 잘 굴러왔다고 본다. 그런 시선으로 볼 때 우리는 저 하나의 미꾸라지를 원망하고 미워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형태에 박수를 쳐도 무난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혁신은 아픔이다. 고통이 당연히 뒤따르게 마련이다. 파리를 죽이는 데 당연히 내 손도 아픈 것처럼 혁신은 나의 아픔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내 손이 아프다고 파리를 가만 놔두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상황판단에서 이루어지는 준비된 자만이 끝을 보게 마련이다. 우리는 지금 준비된 사람인가? 나 자신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저 파리는 되지 말자. 나 스스로 아픈 손을 어루만지는 위대한 존재, 인간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풍경은 지독하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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