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 당선자는 1956년 경남 창녕 출생으로 경기고와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80년 22회 사법고시에 합격, 1년 간 대구지검 검사로 재직했다.
이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등 시국사건들의 변론을 맡으며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그는 94년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하며 시민운동에 발을 내딛었다. '소액주주 권리 찾기' 운동, '국회의원 낙선운동', '1인 시위' 등을 벌이며 새로운 사회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2002년부터는 참여연대에서 나와 다른 방향의 시민 운동을 전개했다. 아름다운재단,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는 비판과 감시보다는 기부·나눔·참여에 관심을 뒀다.
박 당선자는 이번 선거 운동 과정에서 시민단체 재직시 대기업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았다는 여권의 비판에 "내 인생의 단계를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항변했다. 그만큼 그의 인생은 항상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현시키기 위해 도전하는 과정이었다.
검사에서 인권변호사로 그리고 시민운동가에서 모금 전문가로 변신했던 그의 인생은 항상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실현시키는 과정이었다.
이제 그는 최초의 시민운동가 출신 서울시장으로 대중 정치의 영역에 도전하게 됐다.
◇우연히 참가한 시위가 인생의 전환점
박 당선자는 경남 창녕의 한 농가에서 7남매 중 여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는 자신이 책을 좋아하는 평범한 시골 아이였다고 회상했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서울에서 유학 중이던 친형을 따라 상경해 경기고에 입학했고, 법조인의 꿈을 안고 재수 끝에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했다.
하지만 입학한 지 3개월 만인 75년 5월 고(故) 김상진 열사의 추모 시위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투옥돼 4개월간 옥살이를 하고 학교에서도 제적됐다.
훗날 그는 자서전을 통해 당시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중 우연히 행사에 참여하게 됐지만, 이 사건이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출소 이후에는 복교가 되지 않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했고, 독학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해 80년 합격해 대구지검 검사로 임용됐다.
◇검사 생활 1년만에 인권변호사로
투옥된 경력이 있음에도 운좋게 검사로 임용됐지만 6개월 만에 사표를 썼고, 6개월 뒤 검찰을 떠났다. '사람 잡아넣는 일'이 체질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박 당선자의 설명이다.
그는 83년 변호사 개업을 한 뒤 86년 고(故)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맡으면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구로동맹 파업사건', '보도지침사건', '한국민중사사건', '미문화원 방화사건' 등 시국사건의 변론을 맡으며 사회문제에 적극 참여했다.
88년 조 변호사 등 진보적 성향의 법조인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기도 했다.
박 당선자는 인생의 멘토로 주저 없이 조 변호사 꼽는다. 조 변호사에게 '법률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과 '다양한 사회적 세력과 연대하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것'을 배웠다고 한다.
◇시민운동가로 변신…새로운 개혁 방안 모색
그러던 중 그는 91년 8월 돌연 영국행을 택했다.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선진국들의 사례를 보고 싶다는 이유에서다.
영국에서 1년, 미국에서 1년을 보내고 돌아온 뒤 94년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했다. 인권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참여연대는 기존의 진보진영과는 다른 방식으로 정치권, 재벌, 공공기관 등의 개혁을 주도했다. 사법개혁운동, 소액주주운동, 국회의원 낙선 운동 등 '저항'이 아닌 '합법적' 방식으로 주류 사회에 맞섰다.
박 당선자는 참여연대 설립 계기에 대해 "민주화운동 세력을 넘어 중산층 등을 운동으로 끌어 들이고 조직화 해야 한국 사회가 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을 것으로 봤다"고 설명했다.
그는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일하면서 조직운영을 정상궤도에 올려놨다. 이후 2002년 "후배들이 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겠다"며 참여연대를 떠났다.
◇'비판과 감시'에서 '기부·나눔·참여'로
박 당선자는 98년 미국을 방문해 기부·나눔 운동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 사회적으로 잘 정착된 미국의 기부 문화는 부실한 사회적 안전망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2000년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 가게를 설립했다. 참여연대 시절의 활동은 감시와 비판에 방점이 찍혔지만 이 때부터는 다양한 기관들과 협력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이후 아름다운재단은 기부 문화 확산을 목표로 1000억원에 가까운 기부금을 모금했고, 아름다운 가게는 물품 기증과 공정무역 상품 판매 등의 사업으로 매장 수를 100여개까지 늘렸다.
박 당선자는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 가게의 운영이 정상화되자 상임이사 직에서 물러나 2006년 '희망제작소' 설립했다.
이 곳에서 그는 시민들이 내놓은 아이디어를 현실화하고, 지역 사회 발전 방안을 지역민들이 스스로 고민토록 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희망제작소는 지역 소상공인이나 취약 계층의 창업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가 하면, 수영장 성 할인 제도와 같이 시민들의 의견을 현장에 적용하는 사업도 벌였다.
희망제작소를 운영하면서 고민해 온 '참여형 조직 운영'은 그가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 결심을 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다.
◇시민 참여 정치를 꿈꾸다
박 당선자는 무상급식 주민투표 결과로 서울시장 보선 실시가 확정된 지난달 출마 의사를 표시했다. 이 때 박 당선자가 범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될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거의 없었다.
처음에는 5% 내외의 미미한 지지율로 시작했다. 인지도는 출마 의사를 저울질 중이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10분의 1 수준이었고, 조직력과 선거 경험은 민주당 주자들에 비해 부족했다.
하지만 그는 안 원장을 설득해 단일화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안 원장이 후보직을 양보하는 모습은 일반적인 정치 상식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이후 두 사람이 연출해 낸 '양보 정치'는 정치권에 바람을 일으켰다.
그는 지난달 21일 출마 기자회견에서 "시민들의 생각을 듣고 그것을 정책화하는데 더 신경 쓰겠다"고 밝혔다. 시민사회에서 축적한 '소통의 노하우'를 서울 시정에 접목하고자 하는 의지가 읽히는 대목이다.
이후 박 당선자의 지지율은 바람을 타고 상승했다. 민주당 유력 주자인 박영선 의원과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에 비해 10~20%까지 앞섰다.
그는 야권 경선과 보궐선거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약속으로 유권자들을 설득했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거 문화를 만들어냈다.
네거티브 공세로 상대 후보에게 흠집을 내는 선거 전략은 가급적 피했다. 유세차와 선거운동원을 동원하해 소음을 일으키는 선거 운동을 자제하고 간담회를 통해 시민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행보를 이어갔다.
새로운 방식의 정치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박원순 펀드'를 통해 38억5000만원의 선거자금을 47시간 만에 모았고, 네티즌들은 인터넷 상에서 자발적으로 그의 선거운동원으로 나섰다.
선거 과정에서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박 당선자가 야권 단일후보로 선출된 뒤부터 여권의 검증 공세가 이어졌다. 병역, 가족사, 학력, 과거 이력 관련 의혹이 쉴 새 없이 제기됐다. 선거 일주일을 앞두고는 지지율이 역전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 때 안 원장이 다시 한 번 박 당선자를 돕기 위해 나섰다. 선거를 이틀 앞둔 24일 안 원장은 박 당선자의 안국동 캠프를 방문해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선거 결과는 00%차 승리였다.
박 당선자는 서울시장직을 맡게 됨과 동시에 안 원장과 함께 기성 정치권을 뛰어 넘는 정치를 이끌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정치권은 두 사람을 중심으로 개편될 가능성이 높다.
▲1956년 3월2일 경남 창녕 출생 ▲경기고 졸업 ▲단국대 사학과 졸업 ▲사법시험 22회 ▲대구지검 검사 ▲역사문제연구소 초대 이사장 ▲참여연대 사무처장 ▲부패방지입법시민연대 공동대표 ▲사법개혁위원회 위원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 ▲아름다운 재단 및 가게 총괄상임이사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