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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2류 배우들이 만드는 일류 드라마 '광개토태왕'
[단상] 2류 배우들이 만드는 일류 드라마 '광개토태왕'
  • 양기용 기자
  • 승인 2011.09.22 15: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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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하드라마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을 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사극은 이미 결과가 뻔한 역사물이라 자칫 흥미를 잃을 수 있는데도 광개토태왕(이하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라 부름이 맞음)의 전개는 흥미진진하여 계백 이라는 드라마와는 정서가 다르다.

1600여년 전의 역사, 아마 드라마 사상 최고대사를 다루고 있지만 전개는 현재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언급한 것 같다. 그래서 아득히 느껴지는 선조의 숨결이 현대사와 함게 생동감 있게 펼쳐진다.

▲ 용마산 오름구간에서 본 아차산 '광개토대왕길'. 능선 너머가 한강. 아차산근린공원에 조성된 상징적인 길로, 광개토대왕 때는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차지하지 못했다. ⓒ20080500 세상을 향한 넓은 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KBS드라마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대하드라마 중 최고대사를 다루고 있다. ⓒ자료사진

▲ 고구려 전성기의 한반도 지도 ⓒ자료사진

* 중원 고구려비(中原 高句麗碑) : 충청북도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立石) 마을에 세워져 있는 고구려 시대의 비석. 국보 제205호

1981년 3월 18일 국보 제205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203cm,폭 55cm이며 1979년 4월 5일 조사되어 알려졌다. 발견 당시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형태는 넓적한 돌기둥처럼 보이며, 자연석의 형태를 그대로 비면(碑面)으로 삼고 있다. 4면 모두에 글을 새긴 4면비이며, 글자는 전면이 10줄에 23자씩이고, 좌측면은 7줄에 23자씩, 우측면은 6줄이며 뒷면은 9줄로 추정되고 있는데, 글자의 지름은 3∼5cm이다. 마멸이 심해 정확한 글자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400여 자로 추정하고 있다.

이 비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발견 이후로 가장 큰 고구려비 발견이라는 점과 당시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비석이라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더구나 고구려의 금석문(金石文)이 남아 있는 것은 광개토대왕비 등 그 수가 적기 때문에 이곳 중원지방에 완전한 돌비가 남아 있었다는 것은 큰 수확이다. 글씨나 글에 고구려인의 독자성이 잘 나타나 있으며, 비가 만들어진 연대는 423년 장수왕 때로 추정하고 있다.

▲ 중원 고구려비 ⓒ자료사진

*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374~412, 고구려 19대 왕 - 재위 391∼412) 은 1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갖추어준 바탕에서 대정복 전쟁을 수행하였다. 국경 북쪽으로 연 나라와 남쪽으로 백제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고구려의 튼튼한 힘을 과시하며 자신의 지경을 넓혔으며, 숙신과 동부여마저 그 위력 앞에 떨게 하였다. 그가 이룬 최강 고구려는 아들 장수왕에 이르러 절정을 치닫는데, 그 같은 팍스 고구려의 화려한 면면은 광개토왕비의 비문으로 남아 오늘날 우리에게 여실히 전해진다. 39년의 짧은 생애 동안 그가 이룩한 이 공적은 서양의 정복왕 알렉산드로스와도 비견되는 우리 민족의 자랑이다.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 (‘광개토대왕비문’에서) - 발췌 : 고운기 /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의 한국 인물사 우리 민족 최고의 정복왕 광개토대와 中)

*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 이칭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호태왕(好太王)
*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 옛 고구려 2대 수도 국내성(國內城) , 중국 지린 성(길림성 吉林省) 지안 현(집안현 輯安縣 = 통구(通溝) 에 있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의 비석이다. 원명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 씌어 있다. 호태왕비라고도 한다. 광개토대왕(재위 391~412)의 위업을 찬양해서 왕 사후의 2년 뒤, 장수왕 2년(414)에 건립되었다.

* 광개토대왕릉(廣開土大王陵) : 광개토대왕비에서 서쪽으로 약 20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정사각형의 계단식 석실묘로 남아있는 높이만 14,8미터,한 변의 길이가 66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를 지니고 있다.

비신은 방주상(方柱狀)의 자연석으로 높이는 6.34m, 기저부 각변의 길이는 1.5~2m이고, 사면에 1800여 자를 새겼다. 서체는 예서로 기고웅건(奇古雄健)하여, 그 시대의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비문은 고구려의 시조 출자(出自)와 조국창업(祖國創業)에서 시작하여 왕의 무훈 공덕을 기술하고, 수묘인 연호(煙戶)를 규정하여 왕의 유훈과 교령을 적었다. 비문 중의 왜(倭)자가 개변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과 사실규명을 위한 실제적 연구의 필요를 환기시키고 있다.

▲ 광개토대왕비 ⓒ자료사진

▲ 광개토대왕릉 ⓒ자료사진

▲ 삼성동 경기고등학교 옆에 있는 '삼성리토성' 터. 한강 이남을 차지한 백제가 고구려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만든 방어선. 동쪽으로 '몽촌토성'까지 연결된다. ⓒ서울포스트
 

주연을 하고 있는 인물들은 매우 생소하다. 후일 광개토대왕이 된 태자 담덕, 담덕의 부친 고국양왕(이연,이련), 국정의 전면에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국상 개연수(기연수), 태자비가 된 도영 등은 TV가 가깝지않은 나에게는 초면이다. 반면, 후연의 왕 김동현,태자 임호 등 조연들이 오히려 일류급 배우다.

드라마는 백성의 지지를 기반으로 왕권을 강화해 가는 광개토대왕을 그리고 있다. 담덕은 일찍 죽은 형과는 다르게 엘리트 코스를 거치기 보다 거친 야전에서, 문(文)보다 무(武)를 통해, 이론보다 실전에 강하게 단련된다.

사실 국력이 팽창할 때 지도자는 문인보다 무인이 더 낫다. 왜냐면 '국가'라는 것은 다뤄지는 것이 아니라, 건설되고 리빌딩되고 항상 유기적인 생명체처럼 변화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때 국력과 경제력이 급속도로 성장했다.

고구려 태자는 사회소외 계층으로 이뤄진 천군이라는 외인부대 - 지금으로 말하면 특공대를 운영하며 항상 최전방에 선다. 결국 조정의 문인 세력을 견제하고 왕위에 올라 고구려 사상 최대의 (북방)영토를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장수왕에게 승계된다.

용마산(아차산)에 가면 '광개토대왕길'이 있다. 광진구에서 아차산 근린공원조성과 고구려 보루와 아차산성 등 고구려 유적을 정비하면서 상징적으로 붙여준 이름이다. 아차산성에서 고구려 개로왕이 백제군에 피살되었고, 평원왕의 사위 온달 장군도 신라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구리시는 자치단체장이 바뀔 때마다 '조선의 도시', 고구려의 도시'가 반복돼 현재는 광개토대왕 동상까지 제막하고 고구려의 기상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구리는 고구려의 남쪽 변방이었던 점과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이 있는 동구릉(東九陵)과 왕숙천(王宿川)이 흐르는 것으로 보아 '조선의 도시'가 더 설득력이 있다. 왕숙천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상왕(上王)으로 있을 때 팔야리(八夜里)에서 8일을 머물렀다고 해서 '왕숙천'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세조를 광릉에 안장한 후 '선왕(先王)이 길이 잠들다'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역사적으로 고구려는 남방보다는 국내성 이북의 북방 오랑케에 훨씬 많은 전력을 쏟았던 것이 사실이고 광개토대왕 때도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차지하지 못했다. 이것이 고구려가 한반도를 통일하지 못한 이유일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도 고구려의 극히 일부를 포함한 대동간~원산만 이남 에 이르는 불완전한 한반도 통일(676년)이었던 것이다.

이 불완전으로 인해 통일신라는 짧고 후삼국을 거쳐 북방세력이 주를 이룬 고려(압록강~원산만 이남, 천리장성)가 918년 탄생한다. 고려 500년 후 역시 북방세력에 뿌리를 둔 함경도출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1392년)한다. (조선초 세종 때 사실상 지금의 국경이 정해짐, 통일신라+평안도=고려, 고려+함경도=조선)

통일과 분열을 거듭한 한반도 역사는 통일이 될 때마다 북방의 국경은 넓어졌지만 활동무대는 좁아졌다. 지금은 아예 북한을 잃은 휴전상태다. 주변국들과 때로는 전쟁과 상생관계를 유지했지만 지금은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다. 한반도(남한)가 통일신라나 고려가 북방과 대치하고 있는 꼴이었던 역사적 사실로 보아, 전쟁 60년이 지난 현재 남북한은 분단으로 가고있는 것인지 통일로 가고있는 것인지 난 모르겠다.

지정학적으로 북방이 차단된 우리는 매우 어려운 여건이다. 그러나 경제대국, 자원,군사,인구대국인 중국과 일본이 옆에 있어 엄청나게 유리한 조건도 함께한다. 미래에 우리나라가 어떤 위상에 있는가는 오로지 국가 지도자의 지혜에 달려 있다. /서울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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