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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태식 칼럼](62)고약한 경험
[현태식 칼럼](62)고약한 경험
  • 영주일보
  • 승인 2015.10.02 1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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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태식 전 제주시의회 의장

 
나는 결코 이런 일은 하지 않겠노라고 마음 속으로 굳게 다짐을 해도 그런 유혹에 쉽게 빠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은 발생한다. 아마 이런 게 인생의 불가측한 미래인지도 모르겠다.

거래처를 광주로 옮겨 호남선을 타고 목포 뱃길을 이용할 때 생긴 일이다. 이즈음 우리 점포는 제주자전거 시장의 90~95%를 장악했을 때이므로(부산대리점이 인정한 통계임) 바야흐로 내 사업의 전성기에 있었을 떄의 일이었다.

광주에서 물품을 구입하고 속히 내려와 점포일을 보려고 아침 일찍 목포행 열차를 탔다. 목포에서 제주로 가는 배는 아침 여덟시와 저녁 여섯시 두차례 출항하고 있었다. 아침 배를 타려고 부랴부랴 내려왔는데 기차가 연착하는 바람에 배를 놓치고 말았다.

그 때는 늦겨울이어서 부두의 해풍이 차겁기가 그지 없었다. 나는 환자이고 혈압이 낮고 해서 추위를 유난히 탄다. 지금도 4월까지는 겨울용 내의를 입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아침도 못먹고 부두를 서성이려니 발끝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이 시리었다.

한 시간이 넘도록 서성거려 보지만 배 떠난 부두는 사람도 뜸했다. 나는 오버코트를 입었고 신사복을 입었지만 거기에는 남루하게 차린 젊은이 두어 명도 서성거리고 있었다.

이 때 윗저고리도 안입고 와이셔츠에 넥타이 매고 조끼만 입은 말쑥한 청년이 접근하고 제주에 가느냐고 말을 걸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였더니 자기도 서울에서 새벽에 내려왔는데 제주행 배를 놓쳤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위독하여 내려가는 길인데 걱정이 말이 아니라고 하였다. 제주 어디냐고 했더니 서문통이라고 했다. 나는 남을 의심하지 않은 것이 결점이었다. 그 때도 그를 의심하지 아니했다. 서울 어디에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을지로에서 조그만 사업을 한다고 했다. 제주에서 서울까지 가서 대단한 성공을 했다고 칭찬까지 해 주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인즉 아침에 와서 갈 데도 없고 해서 따뜻한 방 하나를 구해 놓고 있다가 나왔노라면서 같이 가서 쉬었다가 저녁 배를 타자는 것이었다. 참 좋은 사람 만나 이 시린 발, 손을 녹이고 좀 쉬게 되었구나 생각하며 제주에 간다는 다른 젊은이들도 함께 가자고 권유해서 그 사람을 따라갔다.

가보니 방은 따뜻했다. 가만히 앉아 있자니 무료하긴 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 사람이 성냥개비를 꺼내놓고 화투를 내놓으면서 너무 심심하니 10원짜리 껌내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원래 화투를 만지지도 않으며 할 줄도 모른다고 했다. 그래도 장난이니 배우면서 해도 되니 자꾸 하자고 했지만 거절했다.

화투 말이 나온 김에 화투를 만지지 않은 이유도 말해야겠다. 중학생 때 형님과 민화투 놀이를 하다가 아버님께 들켰다. 아버님께서 “나는 쉰이 넘도록 화투장을 안 만지는데 화투가 뭐냐?”하시면서 되게 곤욕을 치른 적이 있었다. 그 후로도 아버님이 하지 말도록 하는 것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화투를 만지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형편도 화투노름할 만큼 여유있는 생활을 해본 적도 없고, 해본 게 있다면 책과 씨름하는게 주된 생활이었다. 이제는 살기 위해서 악화된 건강을 달래가며 없는 자본으로 길바닥에 나앉아 자전거 타이어 펑크 때우는 사업을 열심히 하고 있어 화투는 기억에서 아예 사라진 것이었다.

이런데 자꾸 보채는 것을 마다하고 나는 뒤로 물러앉아 방구석을 차지하고 앉아 구경하기로 했다. 부두에서 함께 간 젊은 두 사람과 셋이서 10원짜리 화투노름을 한다. 몇 번 화투가 돌아가더니 주위에 사람이 대여섯 모여들고 제주를 잘 안다느니 친척이 있다는 둥 친구가 누구라는 둥하면서 참견을 하고 처음 말과는 달리 판은 10원 단위에서 100원 단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어! 10원 내기한다고 해놓고, 이 사람 노름쟁이가 아닌가. 나쁜 사람이구만’하고 생각하였으나 밖에 나오면 추위 못견딜 테고 해서 뒷자리에 그냥 앉아 있었다.

판돈은 점점 커지고 한 쪽에서 돈을 실으면 상대방에서도 싣고 하는 노름판이었다. 부두에서 서성거렸던 청년 하나는 몇 번 해보다가 뒤로 물러나 버렸다. 이 사람은 노름 경험이 있어서 사기 도박판에 끼어든 것을 눈치채고 그만 둔 것 아닌가 생각한다. 다른 한 청년은 계속했는데 자기 주머니의 돈이 바닥나서 더 이상 싣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이 청년이 화투패를 보여주면서 돈을 좀 대어달라고 통 사정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가진 것이 없다고 했더니 구경꾼들이 하나같이 나더러 좀 도와주라는 것이 아닌가. 마은 약하고 경험 없는 나는 그들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여비를 털어 몇 천원을 대어주었다. 그래도 부족이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손목시계도 금액을 치어 풀어 놓아달라는 것이었다.

“이 판에 국화 두장(9땡) 갖고 돈 잃을 수 있어요?” 하며 통사정을 하는데 방안은 화투열기로 야단법석이었다. 그래서 현금도 대어주었는데 시계까지 풀어놓았다. 그리고 이상한 판에 앉은 게 아닌가 하는 순간, “장땡이다!”하며 단풍잎 그려진 화투(노루그림이 그려져 있음) 두 장을 펴며 돈을 쓸어안는 것이었다.

나는 시계를 달라, 금액을 친대로 주겠다 하였더니, 그 조끼 입은 청년이 귓속말로 여기는 사람이 많으니 잠깐만 있다가 옆방으로 오라면서 옆방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니 거기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일이분 후 옆방에서 기다리기로 한 그 사람을 만나 시계 대신으로 현금 주고 시계는 찾아야지 하고 옆방문을 열어 본 즉 거기는 길로 빠져나가는 통로였으며, 통로는 일정한 방향으로만 난 것이 아니라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어 있었고 그 사람은 그림자도 없었다.

선물로 받은 애지중지하는 시계를 노름판에 벗어놓고 말았다. 승선 시간은 가까워오는데 사람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다가 부두쪽을 향해 걸어가는데 그 방에서 구경하였던 사람 중 한 명이 다가오면서 날 보고 돈을 얼마나 땄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사기도박단의 고단수 술수인 것 같았다. 나는 화투장을 만지지도 않았으면서 돈과 시계를 잃었으니 경찰에 신고라도 하면 골치아프게 된다고 생각해 나를 노름판의 한 패(공범)로 만들려는 수작인 것 같았다.

사람이 어찌 그렇게 교활할 수 있는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구상에 선한 사람의 숫자는 줄어들어가고 악한 사람 수는 늘어만 가니 사회가 평화스러워질 리가 없다. 착한 사람은 허약하고 용기가 없어 나쁜 사람을 몰아내는 일에 소극적이고 악한 사람은 단결력이 강하고 착한 사람은 자기 혼자의 보신에 급급하여 남의 뒤로 숨으니 악이 기승을 부리게 되는 것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고 하는 ‘토마스 그레샴’의 법칙이 돈이 아닌 인간 사회에서도 적용이 되고 있다고 봐야 하겠다. 타향에서 섣불리 권리를 주장하러 다니다가 큰코 다칠 것이 뻔하다. 경찰이 정말 억울한 사람 편에 정직하게 설 것이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몇 사람이나 될까? 나는 배를 타고 오면서도 집에 와서도 이 어이없고 황당한 일에 대하여 깊이 깊이 생각하였다. 사람이 자기 혼자 아무리 깨끗하고 정직하고 고고하더라도 주위가 모두 더럽고 부정직하고 비굴하다면 자기 뜻과는 아주 달리 상반되게 말려들게 되고 큰 욕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나는 또 비싼 값을 치르고 가치있는 교훈을 얻었다고 자위하였다. 그런 일을 당하고 난 후 내가 당한 이야기를 주위 사람에게 해봤더니, 목포행 여객선에서 사기도박판에 말려들어 장사자본을 몽땅 털려 부도났거나 잘 되어가던 사업이 형편없이 찌그러든 사람이 수도 없이 많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잃은 돈을 찾으려다 죽지만 않을 만큼 두들겨 맞거나 물귀신이 된 사람도 있다고 했다. 목포에서 제주에 이주해 우리 집 이웃에 사는 사람의 말인즉 목포가 어떤 덴데 당신이 도박을 안했으니 그 정도지, 큰일 날 뻔 하였다고 말하며 하나의 사건을 예로 들려주었다. 기막힌 사기극 한 편의 내용은 이러하다.

목포 부두에 새벽에 내려 근처 식당에서 조반을 먹고 다른 곳으로 향하는 손님을 상대해서 안면이 없는 사람이 접근해서 어디 가시냐고 공손히 물으며 접근한다. “서울 갑니다”라고 대답하면 그 사람도 “나도 서울 가니 잘 되었네요. 가다가 점심도 같이 하고, 같이 여행하십시다” 아주 친절한 태도다. 같은 식탁에서 식사하려는 듯 주문까지 해놓고는 잠시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며 가방을 탁자 위에 놓으며 봐 달라고 부탁하더란다. 조금 후에 나타난 사람이 화장실 간 사람의 친구인데 아주 급한 일이 생겨 자기더러 그 가방을 가지고 와 달라고 부탁하여 가지러 왔노라며 가지고 가 버린다. 잠시 후, 화장실 갔던 진짜 가방 주인이 나타나 “내 가방 어쨌소?”하고 아주 태연스럽게 묻고 “왜 잘 봐달라고 그렇게 부탁했는데, 누굴 줘버렸소? 그 가방 속에는 대단히 중요한 서류며 돈이 많이 들어있었소. 변상하시오”하고 달려들면 꼼짝없이 당하는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라고 하는 1970년 초의 이야기 한 토막이다.

그 후로 나는 화투치는 사람이 있는 현장을 가급적 피하고 모르는 사람이 화투놀이하는 곳은 쳐다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목포는 정말 가지 않으면 안될 때 한두번 다녀왔고, 그 곳을 거쳐야 될 일이 있을 때도 목포는 돌아서 다니고 있다.

비싼 값을 치르고 얻은 교훈이기에 그 후로는 평생 엉뚱하게 당하는 일이 없었다. 사람은 나쁜 전철(轉轍)을 밟지 말라고 했다. 자기의 뜻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때는 주저없이 단호하고 신속하게 조치를 취하는 것은 결단력 있고 현명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나는 도가니에 든 쥐처럼 당한 것이긴 했지만 이 사건은 평생에 또 하나의 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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