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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태식 칼럼](23)수제비 집의 거지
[현태식 칼럼](23)수제비 집의 거지
  • 영주일보
  • 승인 2015.05.20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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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태식 전 제주시의회 의장

▲ 현태식 전 제주시의회 의장
밀가루 반죽을 끓는 물에 툭툭 잘라서 넣고 끓이면 수제비가 된다. 그러나 평소에 먹었던 그런 수제비를 말하는 게 아니다. 1960년대 서울에서 막노동하며 살 때 돈이 떨어지면 가는 곳이 을지로6가인가 7가인가에 중고건축자재상들이 즐비한 곳으로 간다. 거기 길가에 4~5십평 됨직한 큰 집에 수제비국 식당이 있었는데, 한 그릇에 50환(5·16후 화폐개혁 전 화폐단위) 했는데 그 분량이 매우 많았다.

이 집엔 보통 사람은 가지 않는다. 서울 천지에 우글대는 걸인으로 만원을 이룬다. 나도 서울 천지의 거지 중 한 사람이 된 것이다.

돈이 떨어지면 배는 고프고 체면이고 뭐고가 없다. 죽을 고비를 당하면 차비를 하려고 꼬불쳐 뒀던 돈을 들고 걸어서 을지로까지 가서 수제비국 한 그릇을 사 먹으면 배는 채워지는데 문을 나서기가 그렇게 망설여졌다. 들어갈 때는 배고파서 누가 보든 말든 들어갔지만 이제 그 수제비집 문을 나서려면 누가 보아도 거지라고 인정할 것이므로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아 한참 망설이다가 문을 열고 도망치듯 빠져나온다.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알아보고 손가락질 하며 쳐다볼 것 같았는데 문을 나서고 보니 아무도 보는 사람, 아는 사람이 없어 마음이 놓인다. 이후부터는 가끔 갔으나 그렇게 망설이거나 창피해하거나 부끄러운 생각이 없어져 면역이 되었다. 거지질 삼일만 하면 부끄러움이 없어진다는 격언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겨울에 길가에 눈이 쌓이고 성에가 짙게 낄 저녁 무렵 남대문 시장이나 뒷골목을 서성거려 본다. 가다 보면 길가에 무슨 짚과 가마니 같은 것을 쌓은 무더기가 군데군데 있었는데 가만히 들여다 보았더니 그 속에 사람이 들어가 겨울밤을 지새는 것이었다. 그때 서울 거리의 풍속도의 한 단면인 것이다.

오갈 데 없는 전쟁 피난민, 밥벌이 못하는 극빈자, 불구자들이 걸식하며 헤매다가 저녁에 갈 곳이 없으면 이렇게 엉켜서 가마니태기를 집 삼아 서로 몸의 온기를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어려울 때 이 사람들을 떠올리고 서울 을지로의 수제비 집에서의 경험을 잊지 않는다. 이때의 체험이 삶에 큰 참고가 되고 어려움을 이기는 반면교사가 되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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