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건축현장 인부로 출근하기 전에 터를 고르고, 두꺼운 판자로 벽돌틀 상자를 만들고, 짓이긴 진흙을 지끈지끈 밟은 다음 틀에 넣어 3~4일 있으면 어느 정도 마르고 굳어진 다음, 이 모형틀을 들어내면 흙벽돌이 완성된다. 이걸 차곡차곡 쌓아 벽을 만들어놓고 루핑으로 덮으면 집이 된다.
그러나 벽돌이 마르기 전에 비가 내리면 이 공사는 헛수고가 된다. 이렇게 흙벽돌 제조공사는 한 달쯤 계속해야 서너평 정도 지을 벽돌을 생산할 수 있다.
나는 건축공사판에 가서 벽돌 쌓는 데 심부름을 하며, 일당 이백환을 벌면서 내 살집을 지었고, 이런 와중에 저녁에는 한두 시간씩이라도 공부를 했다.
형님께 마지막 부탁이라 말씀드리고 2만환 넘게 지원받았다. 그 돈으로 지붕을 만들 목재를 사서 지붕틀을 만들고, 또 기름으로 절인 종이(일명 루핑)를 사다 지붕을 덮고, 그 위에 바람에 날아가지 못하도록 쫄대(한치 굵기의 각목)를 박았다. 이것으로 드디어 지붕이 완성되어 잠잘 곳은 이제 마련된 셈이다.
내 집 주위에는 6·25때 피난온 사람, 갈 곳 없는 극빈자들이 수도 없이 모여들었고, 이 일대 정릉 야산을 깎아 밤 사이에 수십 채씩 이런 집을 지었다. 산의 나무가 잘리고 그 나무는 판자집 재목과 땔감으로 베어내었으니 산이 벌거숭이가 되었고, 또 그렇게 빈틈이 생긴 공터에는 무덤이 수없이 있었다. 물론 옛 무덤도 많았었는데 이런 무덤을 파헤쳐 버리는 짓은 식은 죽 먹듯 해치웠다.
소주 몇 잔을 봉분 위에 뿌리고 오징어 다리 몇 개 얹어 놓은 후, 제를 올리는 채, 흉내만 낸다. 오징어는 일꾼이 먹고 한 시간이면 무덤 속 유골을 추려내여 비료포대에 쑤셔담고, 더 깊은 산에 가서 땅을 파묻고 흙을 두어 삼태기 떠서 덮어버린다. 얼마 후가 되면 그 곳이 무덤터인지 알 수 없게 되고, 다시 그 터에는 며칠 후 번듯한 무허가 오두막이 들어서게 된다.
지금은 정릉에서 세검정으로 통하는 터널이 뚫리고 번화한 도시가 되어 버렸지만, 1960년대에는 그 곳이 그렇게 빈민촌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촌에는 도둑이 없고 인정이 있었다.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굶고 있으면 자기네 집에 와서 누룽지국물이라도 먹어 보라고 하였으니 마음마저 가난한 사람들은 아니었는 듯 싶다.
지금은 일할 때 누구나 면장갑을 끼고 일해서 참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정릉에서 막노동할 때는 면장갑 끼는 것은 호사요 낭비였다. 나는 흙벽돌집을 지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시멘트블록집을 짓는다. 그 공사 현장에서 나는 블록을 날라다 주는 일을 한다. 한나절 일하면 시멘트 독(毒)에다 날카로운 모서리에 닳아서 손바닥 가죽이 벗겨지고, 벌겋게 핏독이 오르고 손가락이나 손에 상처를 입어 피멍들고 쓰리다. 그래도 이 정도는 오히려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일을 안해본 삶은 내가 아무리 이렇게 글로 써 놓아도 전혀 실감을 못할 것이다. 경험하지 않고는 그 못견딘 참상을 알 수 없다.
이런 일도 손 가죽이 터지므로 계속 할 수 없다. 며칠 동안 딴 일을 하며 상처난 손 거죽에 새살이 다시 돋아나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는 지겟꾼으로 일터로 간다. 지금은 돌로 온돌방을 놓는 사람은 없다. 그 때는 주연료가 연탄이었고, 정릉 빈민굴은 땔감이 장작 아니면 나뭇가지였다. 집집마다 온돌을 놓고 겨울에는 장작으로 불을 지펴 따뜻하게 겨울을 났다.
손이 헐어 블록일은 못하지만, 지게로 구들장 나르는 것은 할 수 있었다.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이 변변치 못한데 아침에 흙벽돌을 찍어 널어두고, 지게꾼이 되면 고되고 힘들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어쩌랴. 갈 곳 없고 배운 기술 없으니 막노동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지 않은가? 지금 생각하면 오금이 저리도록 너무도 가난한 생활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나? 구들장을 지고 길도 없는 산비탈을 오를때는 걷는 것도 아니고 벌레처럼 우물거리며 기어가는 것이었다. 무허가 건물은 야산 중턱에 짓는 것이고, 거기까지는 가파른 경사이므로 그 곳을 오르려면 손으로 무엇이든 잡고 발자국을 옮겨야하니 이것은 걷는 것이 아니고 차라리 기어가는 것이다. 힘이 얼마나 드는지 허리가 휘고 어깨가 찢어지는 것 같고 엉덩이뼈는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 날 저녁에도 책장을 몇 페이지는 넘겼다.
내가 흙벽돌집을 완성한 그 해에 4·19학생의거가 일어났다. 산너머에서는 데모가 한창이었다. 신문에는 시위대가 콩볶듯 쏘아대는 총탄에 희생되어 사상자가 많이 났다고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밤이면 늑대 울음소리가 소름끼치게 들려오는 정릉 산골짜기는 살기 위하여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곳이지 정치와는 두터운 벽을 쌓은 곳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헌 신문이라도 한 장 가져오는 날에는 시국 돌아가는 정보에 귀가 솔깃해지는 것이었다. 산너머에서 어떤 때는 총소리가 나는 듯도 했다. 경무대가 멀지 않으니 총소리가 들릴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시멘트블록으로 집을 짓는데 나와 같이 가난한 사람들은 흙벽돌로 집을 짓는다. 누가 도와주는 사람도, 말동무해 주는 사람도 없는 고달픈 작업이었지만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진행하여 갔다. 벽을 쌓고 문틀을 짜 넣고 방 하나에 한 평쯤 되는 부엌을 칸막이해서 한 너댓평 되는 집을 지었다. 고성남 친구의 도움을 얻어서 지붕을 만들도록 하였다. 가구 목수지만 도구와 연장이 있어 가능했다.
지붕이라 해야 한 치 각이 되는 각목을 올려 놓고, 가쇼를 짜 넣는 일이므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이 가벼운 지붕을 잘 눌러놓지 않으면 바람에 날아간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한일자(一) 지붕이므로 지붕 양쪽 3각형 모양을 형성하는 안쪽에 흙벽돌이나 돌을 무겁게 쌓아 바람이 아니 들도록 했어야 하는데 이걸 모르고 있었다.
4월의 봄바람은 짖궂어서 가끔 돌풍을 일으켰고, 내 집은 산 중턱이라 맞바람 맞는 데는 제격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붕 위에서 일하는데 일진광풍이 먼지를 일으키는가 했더니 나를 태운 채 지붕이 저만치 날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들보로 사용한 나무가 몇 토막으로 부러졌다. 벽 위에 얹혀 있어야 할 지붕이 땅 위로 내려와 박살이 나버린 것이다.
참으로 참담했다. 맥이 탁 풀렸다. 앞이 캄캄했다. 그대로 있을 수 없어 주위 사람의 도움을 청하여 올려 놓고 이번에는 바람 드는 곳을 막아 놓고 있었다. 이제 내부에 온돌을 놓고 신문지로나마 도배를 하였다. 문이라고 해야 각목으로 틀을 만들고 마대로 종이 대신 붙이니 여닫이 출입문이 되었다. 그대로 열고 닫을 정도로 이 한 몸 드나들면 그만이므로 별 걱정이 없었다.
그런데 또 날벼락이 떨어졌다. 이번에는 무허가 단속으로 군인이 들이닥쳐 이 집, 저 집 할 것 없이 철퇴를 놓는 것이었다. 국유지인지 시유지인지 모르지만 하여튼 남의 땅이요, 그것도 산비탈에 수도 없이 들어서는 무허가 건물을 그냥 둬서는 안되어서인지 마구 부셔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군인을 향해 지붕 위에서 엉엉 목놓아 울면서 하소연했으나 어림반푼어치도 없었다. 벽까지 막 허물어 버리지는 않고 지붕을 끄집어 내려버렸다. 어안이 벙벙하였다. 시련이 끝도 없고 고달픈 삶에 절망만 더해갔다. 4·19때는 계엄령이 내려 군인이 치안을 맡고 있었다.
그 주위의 게딱지 모양으로 들어선 집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도 많고, 농촌에서 맨 몸으로 상경하여 공사판에서 일하는 막노동자가 많았다. 집을 헐리고는 땅을 치며 통곡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은 눈뜨고 보기 민망할 지경이었다. 아비규환의 지옥이 따로 없었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 사고무친한 처지에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목놓아 대성통곡하고 나니 눈마저 침침하였다.
이 날 현장에서 나는 너무도 원통해서 단속 군인들에게 매달려 “당신네도 사람이냐? 모진 목숨 죽으라는 것이냐?” 하며 아우성치고 울부짖어도 소용이 없었다. 모두들 울다 지쳐 적막이 감도는데, 아침은 이 불행과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나처럼 밝아오고, 눈물과 새우잠으로 지샌 사람들이 초라한 몰골을 한 채 연기를 피우기도 하고, 부시렁거리며 작업 준비를 하는 사람들 모습도 보인다. 절망의 밤이 밝은 것이다. 누가 말했던가 내일도 해는 뜬다고.....
며칠 후 다시 루핑 덮인 지붕이 만들어졌다. 주위에서는 날 보고 너는 집도 짓고 이젠 색시만 얻으면 되었다고 덕담 반 농담 반 반가워해 주었다. 아침 안 먹었으면 자기 집에 와서 누룽지라도 먹으라고 하며 따뜻한 정을 주었던 충북 괴산 출신 강길동씨네 식구, 이북에서 월남한 박씨와 그 부인 은주 엄마, 노동판에 끼워주었던 사람들, 이제도 내 눈 앞에서 아른거린다.
세월은 빨리 흐른다. 어느 덧 5월 장마철이 되었다. 비는 하늘이 터져버렸는지 잘도 쏟아진다. 며칠을 두고 내리는 비는 도랑을 흘러 넘쳐 개울을 이룬다. 흙벽돌이 물을 먹어 아무리 가마니며 거적떼기 같은 것을 구해다 비가림을 해 보아도 바람 때문에 금방 가마니가 젖고 벽으로 물이 스며들어 벽돌이 물컹해지더니 부엌쪽으로부터 벽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었다. 다시 시련이 다가온 것이다.
나는 제주도에서는 벽을 돌로 쌓아서 구멍난 틈새를 흙을 발라 집을 짓는 것만 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벽이 물먹고 허물어지는 것을 예견하지 못했다. 아니 예견했다 해도 밖으로 시멘트를 바르고 방수할 만한 여유가 있는 부자가 아니였으니 뾰족한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이쯤 되니 무슨 감정이고 눈물이고 흥분이고 불평이고 하는 느낌이 없어져 버렸다. 이번까지 하면 집이 세 번 허물어진 것이다. 벽이 허물어지니 지붕이 내려앉게 되었다. 만약 지붕이 내려앉으면 얄팍한 서까래로 쓴 나무들이 박살이 날 뿐만 아니라, 지붕을 덮은 루핑이 갈기갈기 찢겨져 재사용이 안되기 때문에 있는 힘을 다하여 나무막대로 지붕을 받쳐 놓았다. 그리고 책도 이불도 그대로 방에 두고 ‘될 대로 돼라.’ 하는 심정이 되었다. 식량도 바닥나고, 돈도 떨어지고 비가 새어 견딜 수가 없는데 부엌 쪽으로 집의 삼분의 일쯤은 이미 허물어져 버렸으니 기거불능, 아예 체념해버렸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마포의 김병현네 집으로 갔다. 막노동 때 입었던 의복과 신발을 신고, 이발도 제대로 못하고 면도도 안하고 남루한 내 행색은 걸인 꼴이 분명했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부끄러움도 없이 다녔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낯가죽이 두텁게 행동했다고 생각되지만, 그때는 그런걸 생각한 게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친구네 집에 가면 그 집 식구들이 싫은 기색을 않으니 머무를 수 있었다. 이틀 지나서 비가 조금 가늘어져서 집에 와보니 도둑이 들어와 나를 깨워주는 괘종시계를 가져가 버렸다. 이젠 시간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국어대사전이 돈으로 치면 훨씬 값나가는 물건인데, 도둑은 글을 아는 사람이 아니었는지 책이 귀하고 비싼 줄은 모르고 시계만 가져간 모양이었다. 하기사 당장 팔아도 시계는 몇 푼 받지만 책을 알아보고 값을 치어 줄 사람도 몇 없었을 것이다.
여름장마가 지나니 노동판에서 일당도 벌고 집도 재건하기 시작했다. 시멘트는 비싸서 벽에 바를 수 없고 강회라도 바르면 맨 흙벽보다 낫다고 해서 값싼 강회를 바르기로 작정했다.
강회도 모래가 섞여야 한다. 마침 산 아래쪽에서 공사가 벌어졌는데 한국은행 사택 공사라고 했다. 잘은 모르지만 넓은 면적에 터를 고르고 모래를 여기 저기 무더기로 쌓아놓고 있었다. 공사용이었다. 나는 밤에 사람들이 모두 잠들 때까지 공부하다가 한 짐 두 짐 지어 날랐다. 도둑질을 한 것이다. 이렇게 모래를 마련하고 일당을 받을 때마다 강회를 한 포씩 사다가 나 혼자 아침 저녁 미장이가 되어 집의 외벽을 발랐다. 미장 솜씨가 가관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다 바르고 나니 웬만한 비에는 끄떡도 없게 되었다.
가을이 되어 날씨는 싸늘해지고 문틈으로 찬 기운이 스며들어 책 읽기도 힘들어졌다. 내년에 다시 대학입시에 도전하고 청운의 뜻을 펴야 한다는 간절한 결심은 변함이 없었다. 입시철도 가까워오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그 집이 도랑을 제대로 만들지 않아 배수가 시원치 않고 벽이 물을 먹어 허물어질 염려 때문에 안절부절하는 꿈을 자주 꾼다. 뇌 속에 깊게 새겨진 것은 쉬이 지워지지않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