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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태식 칼럼](14)내 신념을 지켜준 호주머니칼
[현태식 칼럼](14)내 신념을 지켜준 호주머니칼
  • 영주일보
  • 승인 2015.04.29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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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태식 전 제주시의회 의장

▲ 현태식 전 제주시의회 의장
무각(無覺) 현태식의 살아온 이야기-『눈 비 바람에도 안 꺼진 촛불』을 연재하며

먼 길을 가려면 길 안내자가 필요하다. 허튼 길로 들었다가 헤매다 보면 갈 길도 못가고 해는 지고 만다. 그것도 가보지 않은 길일수록 길의 선택과 갖추어야 할 장비 등 준비물을 철저히 갖춰야 두려움 없이 안전한 길을 갈수 있다.
선현의 말씀이나 위인, 자그마한 일이나마 성취한 자들의 일대기를 접하려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에 대한 경험담을 실감있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여기 무각(無覺) 현태식(玄泰植)의 살아온 이야기 『눈 비 바람에도 안 꺼진 촛불』은 이런 의미에서 전달하는 바가 크다. 그동안 무각을 단지 제주시의회 의원, 의회의장, 사업적으로도 꽤나 성공한 평탄한 인물로만 알아왔지, 그가 왜 사업에 성공했고, 의원이 되고, 의장이 되었을까 하는 가려졌던 그의 진면목을 비로소 이책을 대하고서야 알 수 있었다.
지금은 도내 최고의 번화가인 신제주이지만, 과거 연동 알 동네 베두리란 벽촌에서 태어나고 10남매 형제들 틈에서 힘겨운 농사일을 도우면서도 학업을 병행하며 성장했다고 한다. 고교시설 ‘신명을 지켜준 호주머니 칼’에서와 같은 바르고 굳센 의지가 오늘의 무각을 만들어낸 것 같다. 그의 외면에 비치는 유연함에도 강한 내면의 세계가 이미 청소년 시기부터 있었구나 하는 대목이다. 힘들고 고난한 가운데도 마음 떠나지 않았던 이야기를 ‘눈비 바람에도 안 꺼진 촛불’에 모아놓았다.
몸과 마음이 괴로운 젊은이들에게 힘이 되고 격려가 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로 꿰어져 있다.<편집자주>

3학년 2학기 6개월분 수업료를 낼 길이 없어 나는 졸업장을 받지 못할 처지가 되었다.
2학기가 되면서 학기 초에 담임하였던 양홍식 선생님이 신성여자고등학교로 전근가고 새 담임선생님께서 부임했다. 장용하(張龍河) 선생님이다. 엄하기로 소문난 선생님이었다.

어느날 아침 등교해서 책상에 책가방을 놓고 의자에 앉자마자 대학노트 한 장을 누가 쑥 내밀었다. 본즉 내용이 교장 선생님께 담임선생님 교체를 요구하는 연판장이었다. 대학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한 공부를 열심히 해야할 때인데 독한 선생님이 담임이 되어 지장이 많으니 교체하여 주십사 하는 요지의 글이었다. 많은 급우들이 동의한다는 서명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동의할 생각이 없었다. 공부를 잘 가르치지 못하면 모를까, 담임선생님으로서 「조퇴하지 말라, 지각하지 말라, 수업시간에 떠들지 말라, 수업료를 제때에 가져오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 아닌가. 이런 가르침을 엄격히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담임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수업료 가져오라는 독촉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게 부당한 처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담임선생님이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한단 말인가. 담임선생님께서 엄격하면 불량학생이 괴롭다. 또한 그들이 일류 대학에 진학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 않는가. 평범한 학생이라면 엄격한 담임 때문에 괴로움을 당할 일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 나는 “너희는 너희 주관이 있어 이 일을 하겠지만 나는 나의 소신이 있어 이 일에 동참할 수 없다.”라고 하면서 연판장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그러니 연판장 돌리는 일이 중단되고 말았다. 적어도 연판장의 무게와 명분이 성립하려면 반에서 일등하는 학생도 끼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1·2학년 때부터 반장 경력이 있고 줄곧 반에서 수석했던 학생이 빠진다면 명분이 서겠는가. 그런데 내가 서명을 안해버리자 내 뒷자리 학생부터는 서명을 받기가 곤란해졌고 일을 추진하던 우리 반 주먹들은 매우 자존심이 상하게 된 것이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더니 누가 내 보고 교실 뒤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우리 반 불량학생들 몇 명이 뒤에 버티어 섰고 앞에는 이들과 한패거리인 몇 명이 서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너가 뭔데 다 연서하는데 거부하는거야?”하고 시비를 걸었다.

“나는 너희들이 하는 일에 방해하지 않고 참견하지 않겠다. 그러니 너희들도 나의 자유를 속박하지 말고 나에 대하여 귀찮은 간섭은 하지 말라.”고 대답했더니 그들 중 한 명이 “너 맛 좀 볼래?”하며 다가서는 것이었다. 주먹다짐이 시작되면 완전히 몰매를 맞을 상황이었다. 내게는 마침 연필 깎는데도 쓰이고 송곳도 붙어있는 집칼을 갖고 있었던 터라, 그 집칼을 얼른 꺼내 칼날을 세우고 다가서는 자의 배에 들이대고 ‘나를 때리기만 하면 찔러 버리겠다’고 하며 눈에 독기를 피웠더니 상대는 주춤하였다. 나로서는 학교 졸업도 다 글른 판에 이판사판이라 생각한 것이고, 저들은 정말 이렇게 무섭게 저항할 줄은 예측하지 못했던 터라 물러설 수도, 뭇매질도 할 수도 없어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었다.

시간이 일 이분 지났을까, 직원실에서 호출한다고 했다. 싸움한 학생 모두가 호출당한 것이었다. 나는 칼을 어디 두었느냐고 추궁당하긴 했으나 어물어물했더니 몸 수색은 면하여 교실에 돌아올 수 있었고 저들은 연판장을 압수당하고 기압도 받았다.

이 사건이 나를 나락에서 구하고, 인생 운명의 고비를 여러 차례 바꾸게 했다. 연판장은 교장선생님께 전달되지 못했고 담임선생님이 추락될 뻔한 체면도 막은 셈이 되었다.

여러 날이 흘러 담임선생님께서 반년분 수업료 일만육천환(화폐개혁 전 단위)을 납부해야 하지만 오천환만 가져오면 짜장면이라도 한 그릇 놓고 마주앉아 서무과장님과 담판해서 졸업시키도록 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서무과장은 수업료 납부 안하면 졸업장을 줄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이었고, 담임선생님은 ‘그래도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지만 우수학생이니까 이 학생이 서울대에 시험쳐야 한 명이나마 더 입학될 게 아닙니까’하고 사정하였다.

나는 오천환을 구하러 아무리 다녀도 구하지 못했다. 친척집에서 몇 백환씩 동정도 받고 학용품 사겠다고 둘러대기도 하고, 사용하던 교과서도 팔고 해서 사천환 남짓한 액수의 돈을 마련하여 선생님께 드리며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십시오.”하는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 나온 뒤로는 나는 학교에 출석하지 않았다. 졸업식에도 안갔고, 졸업사진도 찍지 않았다.

이듬해 서울에 올라고 혜화동 상이군인 대학생이 거주하는 곳 정양원에서 현임종 선배님(친족)의 배려로 약 15일간 숙식을 할 수 있었다. 서울법대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담임선생님 뵐 면목도 없었고 특대생 3년 경력이 정말 부끄러웠다.

특대생이 서울대에 응시했다가 떨어지면 학교체면이 손상된다시며 특대생 제도를 아예 폐지해 버린 이경수(李慶守) 교장선생님의 처사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에겐 특대생 폐지로 인한 상처가 불치의 병들을 얻게 되었고, 대학시험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게 한 것이다. 어떻든 칼을 들고 부당한 처사에 대항한 것이 졸업장을 받게 한 동기가 된 것이고, 지금까지도 정의가 불의를 이기고 끝내 승리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정말 그 때 그 사건이 없었다면 나는 중도 퇴학자가 되었을 것이고, 오현고등학교 7회 동창회장이며, 총동창회 부회장이나 현맥회(賢脈會) 16대 회장으로 졸업 50주년 기념사업 책임자는 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 사건이 나를 떳떳한 오현인으로도 영원히 남게 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연필 깎는 집칼은 ‘정의의 칼’이라 명명했지만 그 칼을 행방을 알 수 없다. 1958년 겨울에 일어난 일이었다.

▲ 기념식에서 현맥회 회장인 나는 은사님과 총동창회 고문을 비롯한 내외귀빈 동창과 그 부인 등 200여분이 참석한 칼호텔 대연회장에서 기념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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