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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딸 낳기를 중히 여겼던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기고]딸 낳기를 중히 여겼던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 영주일보
  • 승인 2014.07.31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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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섭 설문대여성문화센터 팀장

▲ 김동섭 설문대여성문화센터 팀장
작은 조각배에 몸을 싣고 시시각각 달리하는 바람에 의지해 깊은 바다, 심한 풍랑(風浪)을 견뎌내며 제주에 닿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길이 멀고 험해서 쉽게 오고 갈 수 없었던 것은 물론, 배를 타는 사람들은 언젠가는 표류하거나 침몰하여 죽고 만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옛 기록에도 제주는 멀리 큰 바다 가운데 있고 파도가 여러 다른 바다에 비하여 더욱 사나웠기 때문에 표류(漂流)하고 침몰(沈沒)하는 것이 열에 다섯, 여섯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섬사람들은 표류하여 죽지 아니하면 반드시 침몰하여 죽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도내에는 남자의 무덤은 얼마 되지 않을 정도로 작았고, 여자는 남자의 세 곱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여자가 많고 남자가 적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구혼(求婚)하는 자와 장가드는 자는 술과 안주를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위는 저녁에 주안(奏案)을 마련해 섹시의 부모를 뵙고 취한 후에 방에 들었던 풍습도 예전에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농사를 지으며 안정되게 가족을 부양하면서 살 수 없는 거지라 할지라도 처첩(妻妾)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심했는지 심지어는 간질이 있는 자라 할지라도 여자를 얻었으며, 많게는 8, 9인까지 되었다고도 합니다. 절간의 중도 절 옆에 집을 마련하고 처자(妻子)를 살렸다고 할 정도였으니 남자들이 작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제주에서는 생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사일의 거의를 여자들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숨을 참으면서 바다 속에서 작업하는 물질은 물론, 가사(家事)의 대부분도 여자의 몫이었습니다. 한 동안은 제주내 성(城)을 지키는 군정(軍丁)의 한 부분을 민가의 튼튼한 여자를 골라 담당시키며 ‘여정(女丁)’이라 불렀던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진상(進上), 공마(貢馬) 등 공적(公的)으로 운반하고, 사적(私的)으로 장사하는 배의 왕래가 빈번해지면서 뱃일을 해야 할 남자들의 기회는 늘어만 갔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담보할 수 있는 안전한 배의 건조는 요원한데, 험하고 먼 바닷길을 자주 오가야 했으므로 표류(漂流), 침몰(沈沒)은 다반사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상속자인 사내아이가 태어나도 ‘고래와 드렁허리의 먹이’라고 취급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반면, 딸아이를 낳으면 ‘우리를 잘 섬길 아이’라 고 중희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제주에서는 하늘길이 열리기전 딸 낳기를 중히 여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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