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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영 칼럼](22)과수원
[양대영 칼럼](22)과수원
  • 양대영 기자
  • 승인 2013.09.01 0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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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원

-고 영 민-

내가 하는 일은 농약이 바닥에 가라앉지 않도록 하루 종일 약통을 저어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중간에서 호스를 당겨주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1만평 과수원의 사과나무
한 그루 한 그루 빠짐없이 농약을 쳤는데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햇빛에 앉아 막대기로 농약 통을 젓는 것이 여간 지루하고
심심한 일이 아니어서 나는 그 긴 막대기로 약통 안에 영어 스펠링도 쓰고,
씨발이라고도 쓰고, 보지라고도 쓰고, 막대기를 빠르게 휘저어 회오리를 만들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양인순의 이름도 썼다가 지우기도 하고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한나절 사과나무에 약을 친 아버지가 물큰 농약냄새를
풍기며 내게 걸어와 마스크를 벗으며 하시는 말이, 너 하루 종일 약통에다 뭐라 썼는지
내 다 안다! 라며 내 머리통을 어루만지시며 웃으시는데

내가 저은 약통의 농약이 어머니가 당기던 길고 긴 호스를 타고 흘러 아버지가 들고
있는 분무기 노즐을 빠져 나올 때 ~발씨발씨발, ~지보지보지 이렇게 나왔던 걸까,
아버지랑 어머니는 농약에 취해 회똘회똘 집으로 향하고 나는 국광처럼, 홍옥처럼,
아오리, 부사처럼 얼굴이 자꾸만 빨개졌다.

 

 
일상을 이야기한 산문시다. 참 좋다. 우선 쉽고, 일상의 어떤 것도 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과수원 막내 아들쯤 돼 보인다. 그렇지 않아도 집에서 하고 싶은 것이 많은데 농약치는 데 동원돼 하기 싫은 일을 했을 터이다. 일도 싫고 해서 약통 젓는 막대기로 장난을 친 듯하다.

농약액이 분무기 노즐을 빠져 나오는 소리에서 ~발씨발씨발라든지, ~지보지보지라 든지, 아버지랑 어머니가 농약에 취해 회똘회똘 집으로 향하는 표현들은 감각적이다.

일상을 시어로 녹여내는 일이야 말로 바람직한 창작이 아닐까. 감귤원 과수원과 감귤을 소재로 한 시, 또 다른 제주감귤 브랜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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