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행원과 고객이 전자키와 원격보안시스템을 갖춘 금고로 들어간다. 고객이 자신의 번호가 적힌 금고를 찾아 은행원과 함께 키를 꽂고 돌린다. 긴장감 속에 문이 열릴 즈음 은행원은 조용히 사라진다. 혼자라는 것을 확인한 고객은 따로 마련된 방에서 자신의 전용 보관함을 연다. 달러와 금, 비밀장부를 자신의 가방에 쓸어담는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같지만 대여금고를 이용할 때도 이런 광경이 벌어진다. 대여금고는 고액 자산가들의 보물창고다. 부자들이 거액의 수표, 채권, 귀금속 등을 도난이나 화재 등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금고를 이용한다. .
은행에 내용물을 밝힐 필요도 없기 때문에 비밀 장부나 검은 돈을 보관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4일 검찰에 따르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일가 명의의 대여금고 7개에서 예금통장 50여개와 금, 다이아몬드 등 귀금속 40여점이 쏟아져나왔다.
대여금고는 누가, 어떻게 이용하고 있는걸까.
◇대여금고란?
대여금고는 은행이나 증권회사 등 금융회사에서 금고를 열쇠와 함께 빌려주는 보호예수의 일종이다.
금융기관은 보안장치가 부착된 금고를 고객에게 빌려준다. 보관 대상은 유가증권 ·귀금속 ·중요서류 등 실로 다양하다. 법적으로는 '임대차'에 해당되기 때문에 금융회사의 법적인 책임은 그 내용물에까지는 미치지 않는다.
은행 대여금고의 표준규격은 가로 15.6㎝, 세로 60㎝, 높이 7.5㎝다. 책상 서랍과 유사한 모양과 크기라고 보면 된다.
작은 표준형도 있지만 높이가 60㎝에 달하는 대형금고도 있다.
열쇠는 필수, 추가로 지문인식장치를 갖췄거나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전자동식도 있다.
비용은 은행이나 크기에 따라 차이가 난다. 보통 5만~50만원선의 보증금과 매년 1만~5만원의 수수료를 내면 이용할 수 있다.
◇누가 이용하나
거액 자산가들의 전유물인 것으로 느껴지지만 실제 이용 자격에는 큰 제한이 없다. 일부 은행의 경우 여름 휴가를 맞아 대여금고 무료이용 서비스를 선보일 정도다.
하지만 대여금고가 고액자산가인 이른바 'VIP'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다는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VIP'들은 거액의 자산가를 고객으로 유치하고자 하는 은행들로부터 보증금, 수수료 면제 혜택을 받으며 대여금고를 이용한다.
농협은행 관계자는 "다른 은행만큼 (대여금고 수가) 넉넉한 편이 아니라서 VIP 고객에 한해 운영한다"며 "휴가철에 무료로 대여해주는 경우도 없다"고 설명했다.
하나은행은 우수 고객과 영업점장이 대여금고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 개인 또는 법인에게만 금고를 빌려주고 있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은행 내부적으로 고객등급과 거래규모를 감안해 대여 여부를 결정한다"고 설명했다.
외환은행은 신용이 확실하고 부점장이 인정하는 고객에 한해 금고를 대여한다. 신한은행도 거래실적이 양호하거나 영업점장 재량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한 고객에게 사용권을 준다.
◇뭐가 들어있나?
전두환 전 대통령의 금고에서는 예금통장과 귀금속 등이 쏟아져나왔다. 대여금고엔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을까.
대여금고에 들어있는 정확한 내용물은 은행도 알 수 없다. 비밀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은행 직원들은 고객이 금고를 열 때까지 동행하지만 고객이 내용물을 혼자 볼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한다.
은행 관계자는 "부패 또는 화재 위험만 없다면 무엇이든 보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본인 외에는 금고에 뭐가 들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보통 금, 달러, 귀금속, 유언장, 비밀장부, 집문서 등 도난이 우려되거나 다른 사람이 쉽게 보면 안되는 물건들이 대여금고로 들어간다고 보면 된다.
대여금고에 들어가는 물건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일반적으로 귀금속이나 유가증권 등이 대여금고에 들어가지만 여의도에서는 비자금 통장, 명동에서는 사채업자들의 달러나 채무자 명부 등이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졌다.
불법적인 물건을 숨기거나 '검은 돈'을 숨기는데 대여금고가 악용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본인 명의로 부동산이나 예금이 없다며 세금은 내지 않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체납자들도 대여금고를 애용한다.
실제 지난해 경기도가 1000만원 이상 고액 체납자의 대여금고를 압류, 개봉했을 때 체납자들이 숨겨놨던 금괴, 금도장, 황금열쇠, 달러뭉치, 여행자수표, 등기관리증 등이 쏟아져나오기도 했다.【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