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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한자도 국어, 한글만으론 안돼?
[시론]한자도 국어, 한글만으론 안돼?
  • 나는기자다
  • 승인 2012.10.29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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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발용’이라고 적힌 헤어젤을 양발에 바르련다는 어린이를 봤다. 이 딱한 초등학생에게는 ‘내복약’도 고민거리다. 개그라고 비웃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문정책정상화추진회(회장 이한동)가 내놓은 보기들을 살피면 긴장하게 된다.

‘풍비박산(風飛雹散)’을 ‘풍지박산’, ‘희한(稀罕)’을 ‘히안’, ‘재실(齋室)’을 ‘제실(祭室)’, ‘(국기)게양’을 ‘계양’으로 잘못 쓰거나 ‘결제(決濟)와 결재(決裁)’, ‘호수(湖水)와 호소(湖沼)’ ‘산림(山林)과 삼림(森林)’ ‘개발(開發)과 계발(啓發)’을 혼동하는 남녀가 흔하기만 하다.

사당 ‘Chungjangsa-shrine(忠壯祠)’은 ‘Chungjangsa-temple(忠壯寺)’이라는 절이 돼버렸고, ‘항교(鄕校)’는 교량(橋梁) ‘bridge’로 표기했다. 어느 대학 영자신문은 주간(主幹) 교수 ‘advisor’를 주간(週刊) 교수 ‘weekly professor’로 둔갑시키기도 했다.

“우리는 지난 2000여년 간 한자와 한글을 국자로 사용해 왔다. 그러나 1948년 한글전용법 제정과 2005년 국어기본법 제정 등 한글전용정책 시행으로 어문정책의 방향을 잃어 왔다. 이로 인해 우리는 초·중등학교의 국어교육은 물론 교육, 학술, 문화, 생활 등 다방면에서 언어와 문자의 표피화(表皮化)를 목격하고 있다”고 추진회가 개탄해도 딱히 반박하지 못할 실태다.

추진회가 헌법소원 ‘국어기본법 등에 대한 심판청구서’를 냈다. “초·중·고등학교의 국어 교과에서 한자교육을 배제한 부분은 헌법에 위반된다”는 결정을 구하겠다는 의지다. 한자어는 원칙적으로 한자라는 글자로 적고, 한자로 적힌 한자어를 한국어의 발음으로 읽어야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된다고 설득한다.

한글은 안 되고, 한자만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한자혼용으로 의사를 전달하기 어렵거나 싫은 사람은 한글로 공문서를 작성해 국가기관에 제출토록 하고, 한자혼용 혹은 한자(한글)의 표현수단으로 의사를 전달코자 하는 사람에게는 선택권을 열어줘야 한다는 의견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담고 있는 기미독립선언서는 물론이고, 이 나라의 최고법인 헌법이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표현수단으로 한글·한자 혼용체를 건국 이후 현재까지 60여년 동안 사용해 오고 있는데도, 이러한 살아 있는 헌법의 언어가 우리말 국어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국어기본법은 그야말로 이 나라의 역사와 규범적 뿌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고 이들은 판단한다.

한글은 고유글자, 한자는 중국글자, 한글전용은 우리것을 존중하는 애국적 사고의 표현, 한자혼용은 사대주의의 발로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중대한 오류’라며 거부한다. 한국어가 한자어와 고유어로 이뤄졌다면, 한자어는 역사에서 형성된 고유한 문화이며, 한자어 표기수단인 한자 역시 문화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강조한다. 한자어가 한국어의 주된 구성부분임에도 한자어의 표기수단인 한자를 ‘남의 것’으로 배척하는 것은 자기모순이요, 자기부정이라는 지적이다.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하면 한자어는 소리만 남고 그 의미는 사라져 버린다. 한자를 떠난 한자어는 언어가 아니다. 한자어를 한글로 표기해도 의미가 살아있다는 주장은 과거에 이미 한자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나 적용되는 이야기다. 한자를 배우지 않은 국민에게 한자어는 그 의미가 모호한 소리에 불과하다”며 문제 삼는다.

상당부분 타당하다. 송기중 서울대 명예교수(국어국문학)는 “따지고 보면, ‘한글맞춤법’은 표음문자를 표의문자와 같이 쓰는 법”이라고 정의한다. 개별글자는 표음이지만 단어단위는 표의다. 현실발음을 표시하는 표기보다 의미를 표시하는 표기가 유리하기 때문에 비록 표음문자이지만 표의문자와 같은 표기가 정착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추진회의 견해는 상식선이다. 한문이 아니라 한자를 가르치자고 호소한다. ‘鬱陵島’라고 쓰지는 못해도 읽을 줄은 알아야(울릉도) 한다. 한자란 쓰는 게 아니라 컴퓨터 키보드로 치고 마우스로 찍는 것이 당연한 세상이므로 그렇게 타협해도 무방하다. 아예 모르는 것과 기억에 가물가물한 것은 천양지차다. 오기에 대한 경각심을 갖출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한글전용을 지지하는 층이 추진회에게 순순히 양보할 리는 없다. 이희승(혼용)과 최현배(전용)의 부활 양상이 빚어질 것이다. 최현배는 주시경 학설을 계승한 한글파, 이희승은 박승빈과 윤치호 중심의 정음파와 닿아있다. 특히 윤치호는 감정이 개입된 애국과 친일 논리의 격돌장을 제공할 개연성이 있는 인물이다.

전문가 집단이 아닌 보통사람들 사이에서는 한글전용이 득세하게 마련이다. 인터넷 댓글이 여론처럼 수용되는 나라이므로 어쩔 수 없다. 피교육대상인 아직 젊고 어린 네티즌에게 한자습득이란 곧 학습과목 추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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