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새누리당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당내 대선 주자로 최종 결정됐다. 박 후보는 20일 대선경선 후보 5명 가운데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며 당당히 여권 대선주자로 올라섰다.
그동안 각종 여론조사에서 보듯이 박 후보의 독주는 이미 예견돼 왔다. 여권에서는 박 후보가 지지율면에서 압도적으로 치고나가는 바람에 오히려 2위 싸움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박 후보는 각종 악재에도 불구하고 같은 당 후보들과의 경쟁에서 단 한번도 1위를 놓치지 않았다. 당 안팎에선 경선 초반부터 '대세론'을 이어가는 그를 두고 '박근혜 추대론'이라고 촌평하기도 했다.
그는 이날 대선 후보로 확정되면서 우리나라 정치사상 유력 정당의 첫 여성 대선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전직 대통령의 자녀로서 첫 대선후보라는 상징성도 얻게 됐다.
박 후보가 이번 12월 대선에서 당선된다면 헌정사상 첫 여성대통령이 된다.
◇ 3번째 대권 도전 '첫 여성대통령' 고지 앞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후광을 얻고 정치권에 입문한 박 후보는 5선 국회의원으로서 녹록하지 않는 정치 역정을 걸어왔다.
하지만 유신시대의 어두운 그림자는 매번 박 후보의 발목을 잡았다. 이번 경선과정에서도 야당은 물론 여권 경선 후보 경쟁자들에게도 집중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02년과 2007년 두 번 대선 후보로 나섰다가 고배를 마셨고, 이번 3번째 대권 도전에 나서면서 헌정사상 '첫 여성대통령'의 고지를 앞에 두고 있다.
그는 지난달 10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슬로건으로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강조했다. 시대적 과제인 '변화', 그의 정치철학을 상징하는 '민생', 유권자가 원하는 '개인화' 등 3가지 가치를 기초로 했다.
이는 각각 '기다려온 변화-박근혜', '국민의 삶과 함께가는-박근혜', '내 삶을 위한 선택-박근혜'라는 콘셉트로 발전됐다.
◇ '비운의 공주', 22세에 퍼스트레이디로 '정치 시작'
박 후보는 1952년 2월 아버지 박정희와 어머니 육영수 사이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그 후 육군 소장이던 부친이 1963년 5·16쿠데타를 일으키며 정권을 잡았고, 1979년 10월26일 고 박정희 시해(弑害)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약 18년간 청와대에서 정치를 지켜보며 살았다.
그는 우리나라가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루는 과정도 근거리에서 보고 자랐다.
그러나 그는 첫 인생에서 큰 굴곡을 맞게된다. 74년 8월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가 총탄에 맞고 절명했다.
어머니를 잃고 난 후 그는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해오면서 사실상 정치에 눈을 뜨게 된다. 그 당시 22살이라는 많지 않은 나이에 어머니의 자리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대리를 수행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두번째 고통은 또 예고없이 찾아왔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979년 10월26일 총탄에 아버지마저 잃게 된다.
원칙주의자 박근혜의 모습은 일화에서 엿볼 수 있다. 당시 박 후보는 사소한 국정도 수첩에 일일이 기록하며 챙기는 습관 때문에 '수첩공주'라는 별칭을 얻었다. 날씨 정보만 나와도 청와대 보고 메모를 철저히 했다는 일화가 있고, 특히 10·26 사태가 난 날 아버지 유고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그의 첫마디는 "전방의 상태는 괜찮습니까"였다고 한다.
◇ 2004년 '차떼기 당' 오명 벗고 뚝심 발휘…당내 1인자 등극
그후 약 20여 년간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온 그는, 1998년 15대 국회의원 보궐선거(대구 달성)에서 (구)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되며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정치 두각은 이즈음부터 서서히 드러난다. 2000년 당 부총재로 당선됐지만 당시 이회창 전 총재와 정치 코드가 맞지 않아 결별을 선언하고, 신당(미래연합)을 창당했다.
이어 2002년 이회창 전 총재로부터 당권·대권 분리를 약속받은 후 재입당해 사실상 여권의 1인자로 등극한다.
그는 2004년 불법대선자금 수수로 이른바 '차떼기 당'이라는 오명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닥쳤을 때 당 대표를 맡아 특유의 '뚝심'을 발휘한다.
그 해 치러진 4.15총선에서는 대통령 탄핵 역풍 악재를 딛고 121석을 확보했다. 이 후에도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에 맞서 4차례의 국회의원 보선과 지방선거에서 완승해 '선거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그는 특히 지난 4.11 총선을 앞두고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다.
지난해 10·26 서울시장 보선 패배 후 잇단 악재로 위기를 겪고 있는 당의 비대위원장을 맡아 지휘봉을 잡았다. 실패할 경우 그의 정치인생은 물론 잠재적 여권 대선 후보로 꼽혔던지라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의 강단은 맞아 떨어졌다. 그는 당명을 개정하고 강도 높은 쇄신책을 단행한 끝에 지난 총선에서 예상을 뒤엎고 과반을 넘는 151석을 거머쥐었다.
예상밖의 결과는 박근혜 대세론에 더욱 힘을 보탰다. 당내 모든 정치는 그의 입에서 시작됐고, 그의 말은 곧 당의 입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박 후보는 대선을 불과 4개월 앞두고 큰 변화를 예고했다. 그는 정치인 롤모델로 엘리자베스 1세 영국 여왕을 꼽았다. 그동안 엘리자베스 1세는 존경하는 정치인이었지 그에게 '롤 모델'은 아니었다.
박 후보는 "엘리자베스 1세를 영국을 파산 직전에서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만든 지도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어릴 때 고초를 겪었지만 시련을 이겨내고 사려 깊은 지도자가 됐다"며 "그가 불행을 겪었기에 남을 배려할 줄 알았고, 늘 관용 정신으로 합리적으로 국정 이끌었기에 국민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고 대영제국을 일으켰다"고 높이 평가했다.【고양=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