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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 애국가]장준하 "듣고도 아무감동없는 자"
[김연갑 애국가]장준하 "듣고도 아무감동없는 자"
  • 나기자
  • 승인 2012.08.18 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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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 <6>

애국가의 기능과 성격과 위상은 한 마디로 규정될 수 없다. 어쩌면 이런 사실이 애국가의 진가일는지도 모른다. 소개되는 다음의 증언과 기록들은 바로 애국가가 어떤 위치인가를 구체적으로 알게 해줄 것이다.

역사상 애국가가 처음으로 불려진 것은 1896년 11월21일 토요일 오후 2시30분, 서대문 모화관을 헐어 마련한 독립공원의 독립문을 세우기 위한 정초식 식장에서다. 이 행사는 우리나라에서 행해진 최초의 근대식 대중집회인데, 이완용 명의의 초청장에는 “독립공원에서 독립문 주춧돌을 노홀 터인데 예식을 시행하고 연셜할 터이니 각하의 참석을 바라옵니다”라 하였고 다양한 공개행사가 소개되었다.

만국기로 식장을 장식했고 독립협회 회원들은 물론 일반시민들과 정부 각부 대신과 각국 공사 그리고 영사와 외빈들이 거의 모두 모였고 거기다 배재학당과 육영공원 학원들과 무관학교 학생 등 전체 6000여 명이 운집했다. 이 행사에서 학생들에 의해 애국가·독립가·진보가가 불렸다.

“오늘 대죠션 독립협회 회원들이 독립문 주춧돌을 독립공원에서 오후 2시 반에 놓을 터이요, 례식과 축사를 연설하여 학교 학도들이 애국가를 노래할 터이요, 체조를 할 터이라. 독립가는 배재학당 학원(學員)이 하고, 진보가는 배재학당 학원이 하고, 체조는 영어학원 학원이 할 것이라 한다.”

1907년 개성에 있던 한영서원(교장 윤치호) 졸업생의 증언이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조사자료에 이 학교 학생들의 증언이 수록되었는데, 대체적으로 아래의 내용과 같다.

“내가 9세 때 한영서원에 입학한 당시 서원 벽장문에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라는 지금의 애국가를 붓으로 써 붙이고 선생 박서양씨가 우리에게 가르치면서 이것은 윤 원장(윤치호)이 만드신 것이라고 수차 말하던 것을 명백히 기억하고 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선우훈 선생의 회고록 <민족의 수난> 중 사건의 배경을 설명하는 애국가와 태극기에 대한 증언이다.

“학교에서는 태극기를 둘러메고 서양 북에 나팔을 불며 군대식 조련을 하고 있지 않은가. 강당과 교단에서는 매일 같이 불을 토하듯 피 끓는 애국정신을 외치고 있지 않은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그들의 입에서 애국가가 불려지고 있지 않은가. 이 애국가는 지금 촌부와 목동, 어린아이까지 산에서 들에서 부르고 있지 않은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간담이 서늘해지는구나”

평양의 3·1 만세시위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3월1일〈광무황제 봉도식〉을 가장하여 평양시의 첫 시위운동을 촉발시킨 순간이 생생하게 기록된 것이다. 기독교계 시위 집회의 전형이기도 한데,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시위운동(독립선언식)에서 태극기와 ‘애국가’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일 것이다.

“3월1일 오후 1시였다. 남녀교인들과 시내 지식계급에 속하는 유지들이 식장인〈숭덕학교〉교정으로 모여들어 장내는 1천 수백 명에 달했다. 선교사 모페트(馬 布三悅)도 내빈석에 와 앉았고 일본인 경찰인 사복형사들이 경비진을 지키고 있었다. 봉도식(奉悼式)은 찬송가와 기도로 간단히 조의를 표하고 끝나자 돌연히 대형 태극기가 단상에 게양되어 군중들은 꼭 10년 만에 다시 대하는 국기인지라 한편 놀라고 한편 기뻐 주목할 즈음, 도인권이 단상에 뛰어올라 이제부터 ‘조선독립선포식’을 거행하겠다고 그 취지를 설명했다. 이어서 목사 정일선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목사 강규찬이 연설했다. 식은 목사 김선두가 사회하였고, 애국가 봉창은 삽시간에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로 화하였다.”

충청남도 당진군의 대호지면 시위는 천안 ‘아우네 장터’ 만세운동에 버금가는 대규모의 시위였다. 1919년 4월4일(음력 3월4일) 11시께의 상황인데, 애국가 가사를 현장에서 배포한 사실을 알려 준다.

“선언문 제창이 끝나고 이어서 행동 대원은 전날 밤에 등사한 애국가를 나눠 주었다. 그리고 태극기를 앞세우고 선두에는 원로 지휘 이인정과 행동총책이 앞장섰다. 조선독립만세와 애국가를 목이 터져라 외치며 장정리를 거쳐 천의시장으로 향했다.”

3월5일 평안남도 신창지역의 3·1운동은 3500여명의 군중이 집결한 독립선포식이었다. 이 상황은 조직적인 지도부에 의해 주도되었고 태극기와 애국가기 미리 준비된 상황을 알려 준다.

 

“예정한 3월5일 오전 10시 면사무소 앞 광장에는 신창면민들은 물론 30~40리 떨어진 먼 곳에서까지 모여들어 대 성황리에 먼저 독립선포식이 거행되었다. 식전은 독립선언서 낭독, 독립연설, 애국가 봉창, 만세 3창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이곳 광장은 시가 큰 거리와 통하는 지점이었기 때문에 광장에서 시위 군중이 가두로 진출하니 이날 장돌림이 장 보려던 일을 걷어치우고 이에 합세하여 3천5백명으로 헤아리는 대행진이 벌어졌다.

해방이 되어 안익태 작곡 사실이 국내에 알려지며 악보가 각 매체에 소개되고 나름의 의미를 부여했다. 다음은 대구에서 발행된 월간 <영남교육>에 소개된 글이다.

“8·15 이후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의 곡조는 원래 스코틀랜드의 이별곡으로 애조를 가득 띤 슬픈 곡조다. (중략) 지금에 와서는 이 곡조가 부자연하고 적당치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미국에 있는 동포들이 이 곡조가 적당치 않았음을 먼저 깨닫고 지휘자로 또는 첼리스트로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안익태에게 부탁하여 장중하고도 활발한 새 곡조를 작곡하여 재미 동포들은 지금 전부 이 새 곡조로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패망하여 조선을 떠나는 일본인들은 올드랭사인의 애국가를 자신들이 불렀던 ‘졸업식가’와 ‘이별가’로 생각하였다. 그들은 우리의 애국가 곡조라는 사실을 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땅에는 해방이 되어 이제 우리끼리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신나게 애국가를 부르며 행렬을 했는데 서울역에서 보따리를 걸머지고 쫓겨 가던 일본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감격했다는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의리에 강하고 예의바른 민족이라서 우리가 오늘날 떠나가는 마당에 그래도 36년간의 정을 잊지 못해 저렇게 이별곡을 불러준다고 하더란 것이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넌센스인가.”

김성칠(金聖七 1913~1951)은 서울대학교 조교수로 역사를 강의하다 피란지 고향 영천에서 1951년 10월 괴한의 저격으로 사망했다. 그는 변사 직전까지 일기를 썼는데, 사학자답게 귀한 기록을 남겼다. 1945년 12월부터 1951년 3월까지의 일기에는 태극기와 애국가에 대한 언급이 6차례나 있다. 이 중 애국가는 6·25 발발 이후로 좌우익 대치 상황에서 극단적인 처지에 불리는 상황으로 기록되었다. 인용문은 1950년 8월22일, 경기도 광주에서 있었던 “인민군이 변복한 때문에 생긴 비참한 이야기 한 가지”를 구술체로 서술한 부분이다.

“잃어버린 대한민국에 대한 그리움에서랄지, 또는 동족상잔의 내란을 일으켜서 자기네들의 집과 재산을 불태워 버리게 하고, 이러한 죽을 고비에로 몰아넣는 인민공화국에 대한 반발심에서랄지, 하여튼 될대로 되어라 하는 거진 자포자기적인 심리로 어느 한 사람이 ‘동해물과 백두산이’하고 목청을 돋우면 아무것도 꺼릴 것 없다는 듯이 모두를 따라 합창하고, 그리고 마지막엔 통곡으로 변한다 거든요. 한번은 이러한 장면을 변복한 인민군이 목도하고 갑자기 권총을 내어서 난사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구요. 그런 이야기를 들었건만 우리도 산골에 호젓이 모이면 또 그 노래를 부르고 울고 하였답니다.”

안익태 선생의 유해가 고국 국립묘지에 안장되던 날, 시인 모윤숙은 일제강점기 하의 어두운 상황에서의 애국가를 작곡한 사실을 감격적으로 표현했다.

“눌리고 질식된 그 시대에 서로 붙들고 마음 합할 곡조도 몰라 제국일본의 기미가요를 불렀을 때 선생은 숨어사는 조국의 흐느낌과 불붙는 항거의 절규를 들었고, 헤어졌던 겨레 손잡고 불러볼 고독한 동해물과 백두산을 껴안았습니다.”

1965년 박정희 군사독재에 맞서는 대일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 투쟁 위원회’ 강연장에서 애국가가 불린 상황이다. 강연자는 윤보선·함석헌·장준하였다. 장준하는 이날의 체험을 <애국가와 경찰관>이란 글로 남겼다.

“애국가란 나라와 민족을 상징하는 노래다. 국민의 통일된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노래다. 그러므로 그 국가를 듣고도 아무런 감동이 없는 자는 귀머거리가 아니면 혈맥에 흐르는 피가 다른 이민족(異民族)일 수밖에 없다. 그때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잠시나마 숙연해진 그들의 태도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이 이 나라의 경찰관일지언정 이민족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경 그들도 그 순간이나마 우리가 자기들의 적이 아니라, 그런 노래도 부를 줄 아는 체내에 흐르는 피가 같은 동족이요 같은 국민이라는 것을 깨닫고, 무슨 위대한 터득이라도 한 듯이 희한해 했는지도 모른다.” <끝>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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