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해 임시정부는 1919년 4월10일 오전 10시, 첫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회의에서 8개항을 논의하였다. 이 중 제8항에서 국호를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한다고 했다.
고려공화국·조선공화국·대한이 논의되었지만 이영근 의원이 제청한 ‘대한’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여운형은 “대한이란 우리나라 역사상 오래 사용된 말이 아니고 조선 말기에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기 때문에 다시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제청자들은 오히려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는 의미에서라도 대한으로 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 중국이 신해혁명 이후 사용한 ‘중화민국’에서 ‘민국’을 따서 ‘대한민국’을 국호로 최종 결정했다.
국기는 1943년 6월29일 국무회의에서 국기양식 일치안(國旗樣式 一致案)이 확정되어 공포되었다. “국기에 대하야 종래에 설명이 다단(多端)하여 각언 기설(各言 其說)할 뿐 아니라 제도가 일치하지 못하야····제법(製法)과 척도(尺度)와 상징(象徵)···”을 규정하여 공포하였다.
그런데 국가에 대해서는 국호나 국기와 같이 공포나 규정이 없었다. 2차에 걸친 개정과 제정논의와 한 차례의 허가에 대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1945년 2종의 악보가 발간되었다. 그런데 이상의 두 국가상징이 이미 대한제국 시기에 사용하였던 것이라는 사실에서, 또한 임시헌장 제8조에서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이라고 한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애국가도 같은 맥락일 수 있다. 이는 임시정부와 광복군에서는 어떤 경우든 현 애국가 외에 다른 애국가를 사용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임시정부의 행사에서는 반드시 개회 선언 후 첫 순서로 愛國歌 4절 또는 1, 4절(首末節)을 부르고 국기에 대한 ‘최경례’를 했다.「임시의정원회의록」제8호에 의하면 개원식에서 “총의장의 사회로 개식을 선언하고 일동이 기립하야 애국가를 창한 후 국기를 향하야 최경례를 행하였다”고 하였다. 다음은 임시의정원 제34차 회의 취재기의 일부로 <우리통역> 제1호에 수록된 에피소드이다.
“전체 의원들이 극도로 긴장하고 엄숙한 정신으로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곡조가 합(合)하지 않아서 3부 합창이 되고 말았다. 또 어떤 분은 첫 머리말을 떼고는 가사를 몰라 목소리를 슬그머니 철회(撤回)하고 만다. 제2절에 들어가자 각자 각창으로 어느 노선생님 한 분이 테너 식으로 고성(高聲)을 치니 창가 진행 중에 그만 모두가 웃고 말았다.”
이는 임시정부의 모든 행사 의례에서 첫 순서로 애국가를 불렀음을 알려 주는데, 그 기능은 국가이지만 명칭은 애국가였다. 이는 태극기란 명칭 대신 국기(國旗)로 표기한 용례와는 다른 것이다. 이제 <임시정부공보> 등의 자료에서 애국가 상황을 정리하기로 한다.
임시정부에서의 애국가 논의는 1920년 의정원 회의에서 애국가에 대한 수정안이 상정되었는데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니 수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의 논의가 있었다. 1920년 3월18일 <애국가 수정안>이다.
“김춘숙 외 3씨가 제출한 <애국가 수정안>에 대하여 오윤환씨는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바로 국가를 제정할 필요가 있다면 모르거니와 ‘애국가’는 수정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 외 2~3씨의 토론이 있어 제안자에게 퇴각하기로 가결되었다.”
임시정부는 애국가를 임시로 국가 대용(代用)으로 하고 있다는 인식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새로운 국가의 제정(制定)이 급하지 대용 애국가를 수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취지이다. 그런데 이 기록은 애국가 역사에서 주목을 받을 만하다. 왜냐하면 이 국가 대용은 애국가가 얻은 공식적인 첫 위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 즉 애국가가 국가가 될 수 없으니 새로운 국가를 제정해야 한다고 했지만 1940년 까지도 그대로 쓰고 있음이 확인된다. 임시정부가 창사(1937)에서 치양(1939)을 거쳐 중경에 안착하는 시기에 안익태 악보가 전달되었다. 발신처는 북미 대한인국민회의인데, 올드랭사인 곡에서 안익태 곡으로 애국가를 바꿔 부르는 것을 허가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였다. 이에 대해 임시정부는 국무회의에서 논의하였다.
“애국가 신곡보 허가. 북미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로부터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 신곡보의 사용 허가를 요구하였으므로 대한민국 22년 12월20일 국무회의에서 내무부로서 그 사용을 허가하기로 의결하다.” (임시정부 공보 제69호 1940. 2. 1)
결국 개정이 논의된 이후에도 20여년을 애국가가 그대로 국가 대용으로 불렸음과 애국가의 정통성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임시정부의 국군 광복군의 성립식에서도 연주될 수 있었다. 광복군으로서는 모든 훈련과 행사에서 국가를 연주해야하는 특성상 애국가가 곧 국가로 불린 것이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이듬해인 1942년 ‘국가 제정’에 대한 논의가 있게 되었다. 광복군에서의 필요성 때문인 듯한데, 군가 제정과 함께 제안된 것이다. 제시되는 자료는 현재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 게시되어 있는 자료이다. 1943년 10월29일, 제안자는 신영삼(申榮三) 외 3인으로 주문(主文)은 다음과 같다.
“국가의 입국정신을 소리로 표현하는 것은 국가(國歌)이며, 군의 정신을 소리로 표현하는 것은 군가이므로 본원에서 제정할 필요가 유(有)하다고 인(認)함.”
이 제안은 의원 40인의 출석 하에 상오 9시부터 의장 최동오(崔東旿) 주관으로 속개 되었다. 논의 전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심사안 보고는 원의(院議)로 함이 좋다고 보고(報告)
신의원 영삼-우리는 국가가 없으므로 애국가를 부르는데 그 내용의 언구(言句)가 불미(不美)하고 그 외 창가할 시에는 폐단(弊端)이 썩 많으니 제정을 요구합니다.
엄의원 항섭-원의에 반대는 없습니다. 능력부족으로 금일까지 못하는데 곧 통고하면 좋겠소.
김의원 철남-우리의 국가를 만들 인재가 없으니 국가는 혁명 성공 후에 해도 좋고 현 애국가만 사용해도 좋소.
엄의원 항섭-군가는 무(無)하니 군내에서 사용할 것이 무하다. 그러므로 군가는 있어야 하겠소. 최근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 개식할 때에도 할 수 없이 애국가를 사용한 것이오.
김의원 철남-국가는 토론 합시다. 군가에 대해서는 곧 해도 좋겠습니다. 국가는 절대로 필요합니다. 군가도 역시 불러야합니다. 원안은 찬성합니다. 국가나 군가의 작곡 작가는 대외 응모해도 좋겠소. 직결(直結)하기로 동의했소.
엄의원 항섭-재청
최의원 동오-삼청
의장이 가부를 물은 바 만장일치로 통과되다.”
1942년 10월에 제안한 국가와 군가를 제정하자는 안을 대상으로, 11월4일에 제안자인 신영삼과 엄항섭·최두환·김철남·최동오 간의 논의가 있었다. 여기서의 논의 사항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가 없어 애국가를 부르는데 가사가 문제가 되고 곡조도 부르기가 어렵다. 둘째, 필요성은 있으나 작사·작곡의 능력이 부족하니 혁명 후에 제정하고 그대로 쓰자. 셋째, 대외 공모까지도 하여 제정하자.
이렇게 본다면 국가와 군가를 1942년에 새롭게 제정하기로 논의를 마쳤다. 군가는 용진가·압록강행진가·광복군아리랑이 제정되었다. 그러나 국가는 제정하지 못했다. 이 사실은 1945년 9월에 발행된 두 가지 자료에서 확인이 된다. 하나는 임시정부 선전부가 발행한 <大韓民國臨時政府에 關한 參考文件>에 애국가 악보가 수록된 사실이다. 그리고 김구 선생이 제자(題字)를 쓴 한국어·중국어·영어로 발행된 악보집<大韓國愛國歌>의 존재에서이다.
신나라레코드 김기순 회장은 “이처럼 임시정부에 애국가는 국가 대용으로 불렸으며, 새롭게 제정한다는 논의는 있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대한제국이 사용한 국가상징을 그대로 계승한다는 인식이 작용했을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작사·작곡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감안해야 되는 것은 김구 주석의 인식이 작용했으리라는 점이다. 즉, 김구 주석은 애국가의 작사자가 누구인가를 묻는 의원들에게 “우리가 3·1운동을 태극기와 애국가로 했는데, 그 작사자가 누구인들 문제가 되겠는가? 혁명이 완수되기 전까지는 문제가 될 수 없소”라고 했다. 곧 3·1운동의 현장에서 불린 그 역사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제자를 쓴 애국가 악보집을 발행했다는 사실에서도 입증이 된다.
김구 선생의 이 견해는 임시정부의 견해일 수도 있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분단 체제에 있는 현실에서도 이 견해는 유효하다는 점이다. 곧 애국가의 개정론이나 제정론 역시도 현재로서는 그 당위성을 획득할 수 없다는 사실이고, 더욱이 동족상잔 6·25를 겪은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는 것이다. 【서울=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