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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 애국가]윤치호 사·안익태 곡, 이것이 진실
[김연갑 애국가]윤치호 사·안익태 곡, 이것이 진실
  • 나기자
  • 승인 2012.08.13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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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의 '애국가' <1>

안익태는 평양 숭실학교 입학 이듬해인 1919년 3월 ‘무능 친일교사 추방’ 운동에 가담하는 것으로 <3. 1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그런데 이 때문에 무기정학 처분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경찰에 추적을 당하게 되어 평양 기독병원에 위장 입원하여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안익태는 1919년 10월 선교사 모리스 마오리(M.Mawry 牟義理) 학교장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일본행 도항증(渡航證)을 마련하여 유학을 떠났다. 그동안 안익태의 음악적 소질을 지켜본 교장의 선교사라는 지위로 가능했던 것이다.

일본에 도착한 안익태는 먼저 와 있던 형과 함께 기숙하며 중학교에 입학하려 했다. 그러나 학비문제 등이 여의치 않아 1년 동안 사설강습소에서 기량을 닦다 1921년에야 세이코(正則) 동경음악학원에 입학했다. 그후 이 학교를 졸업하고 동경국립음악학교에 진학하게 되는데, 여기서 첼로 연주자 독일인 웨르코 마이스텔(Orko Meistel)에게 개인지도를 받게 되어 전공을 첼로로 하게 되었다.

1929년 안익태는 일본유학을 마치고 자신감으로 귀국하여 평양과 서울에서 첼로 독주회를 가졌다. 1929년 9월7일자 조선신문은 안익태의 귀국 음악회를 ‘조선인 최초의 기악 독주회’라고 평가했다. 이 공연에 대한 성공 여부는 기사로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간에 당시 YMCA 총무였던 이상재와 조만식을 만나게 되어 이들의 애국열정을 뜨겁게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연주회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30년 10월 초 안익태는 미국유학을 단행하게 되었다. 고국 조선은 일본의 억압으로 음악을 마음껏 펼칠 상황이 아니어서 주변의 권고에 고심한 끝에 결정한 것이다. 바로 이 유학의 첫 발을 내디디며 운명적으로 애국가를 작곡하게 되는 계기를 맞게 되는데, 바로 1930년 10월 초순의 어느 토요일, 미국 땅을 처음 밟은 이튿날 샌프란시스코의 황사성 목사가 시무하는 작은 한인 교회에서였다.

마침 주일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예배 마지막 순서에서 모두가 일어나 국기를 향해 애국가를 합창하게 되었다. 그 곡조는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 사인 Ald lang syne> 그대로였다. 이때의 안익태는 10여년 간이나 일본 국가 ‘기미가요(君が代)’만을 애국가로 접했으니 감격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내 형언키 어려운 비감에 빠지게 되었다. 조국의 애국가가 외국곡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심각하게 확인했기 때문이다.

안익태는 무거운 마음으로 그날 저녁 자신의 학비 모금을 위한 특별 기도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참석자들로부터 조국으로부터 가지고 온 첼로 연주를 주문받았다. 이때 안익태는 마음먹었다. ‘그래 이번의 이 연주로 올드랭 사인 곡조의 애국가는 마지막이 되게 하겠다.’ 이런 각오로 연주한 덕분인지 첼로 독주 애국가는 너무도 슬펐다. 후원자들은 눈물을 훔치며 연주에 답했다. 그의 전기『안익태와 애국가』는 이 때의 각오를 다음과 같이 남겼다.

“남의 나라 곡조라니 내가 애국가를 우리 가락으로 지어내야겠다. 내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사에 생명이 있다. 희망이 있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나의 조국이다.”

이때 안익태는 희미하게나마 새 악상이 떠오름을 느꼈고 이를 마음에 담았다. 이것이 애국가 작곡의 시작이다. 미국 땅에 첫 발을 내디디며 남의 나라 이별가 곡조에 의한 애국가를 듣고, 안타까운 마음에서 작곡을 시작한 것이니 순수한 음악적 동기, 그러니까 위촉이나 의뢰를 받아 의무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자신의 자만이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서 시작한 것도 아닌, 조국애로부터의 출발인 것이다.

1931년 드디어 안익태는 신시내티 음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신시내티 심포니 제1 첼로 주자로 활동하게 되고, 이어 필라델피아 음대 3학년으로 편입하는 행운도 얻었다. 이로부터 본격적인 작곡 수업을 하게 되는데, 바로 이때 애국가의 주제음을 찾게 되었다. 비로소 작곡에 진전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33년 나름대로의 음악세계를 확립하기 위해 커티스 음악원에 들어갔다. 이 음악원 입학은 단순한 학습 과정으로서가 아니었다. 본격적인 작곡과 지휘를 익히게 되는 중요한 계기를 얻게 된 것이니 바로 헝가리 출신 작곡가 F 라이너(Fritz Reiner)를 만나 지휘법과 작곡법을 사사하게 되었다. 이때는 애국가의 전반부를 완성하고 마지막 후렴부의 악상을 남겨 놓고 고심하던 때였다. 이 후렴부의 완성은 예상 외로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이상이 안익태가 애국가를 5년에 걸쳐 작곡하기까지의 과정이다. 신나라레코드(회장 김기순)의 각종 사료를 통해서도 드러나는 사실이다. 그동안 발행된 전기류나 각종 기사는 일본 유학으로부터 라이너를 만나 작곡가로 서는 과정에 대해서는 일치한다. 그런데 안익태가 애국가를 정작 작곡한 시점, 즉 후렴 부분을 마무리한 시기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다르다. 안익태가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귀국 연주를 하게 되는 1960년대 기록들은 1936년부터 38년이라고 했고, 그의 전기류가 발행되는 1990년대에는 1936년을 정설로 했다. 이후 대표적인 포털사이트의 ‘안익태’ 또는 ‘애국가’ 항목에서 1936년 또는 1936년 3월26일을 작곡 시점으로 이어져 오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근거는 조선 내에서 최초로 작곡 사실을 알린 동아일보 1936년 4월15일자 “안익태씨는 다시 동해물과 백두산 곡도 새로 고치어 작곡을 하였다고 한다”라는 보도인 듯하다.

그런데 1986년 독립기념관에서 수집한 자료 중에 안익태 사인이 담긴 애국가 악보가 확인되었다. 1912년 11월 샌프란시코에서 국외한인사회 통합을 목표로 결성된 한인국민회 총회가 20센트의 판매용으로 발매한「대한국애국가」(KOREAN NATIONAL HYMN, EA KOOK KA) 악보이다. 이 악보 상단에 안익태는 클래스메이트 로스(Ross)양에게 주기 위해 영어와 한자로 TO my Ross, Eak Tai Ahn Feb, 5, 1936. 韓人 安益泰․ 一九參六. 正月 五日’이라고 사인했다. ‘1936년 1월5일’이라고 했으니 악보가 판매용으로 출판되는 최소한의 과정을 감안하더라도 작곡 완료 시점은 1936년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후 2년이 지난 1989년에는 이를 확인시켜 주는 결정적인 자료가 확인된다. 재미 사학자 방선주에 의해 대량의 미주 신한민보가 발굴, 공개되었는데 1936년 3월26일자에 안익태의 기고문 <대한국애국가>가 수록되어 있다. 애국가 연구에 한 획을 긋는 자료다.

“아시아 동반도의 도덕적인 대한국 애국가인 만큼 경솔히 작곡되는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과거 5년간 구심 근작하여 약 2년 전에 처음 절은 필하였습니다만 후렴을 필하지 못하고 지나는 도중 지난 11월 하순 어느 날 이른 아침에 실로 하느님의 암시로 후렴 전부를 작하였습니다.”

이 기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은 다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작곡 시기가 ‘1935년 11월 하순’이라는 사실, 둘째는 1964년 불가리아 민요 <오! 두부루얀스키 크레이 O! Dobrujansky kray)의 표절설을 일소시킨 것이다. 1964년 제3회 국제음악제 때 불가리아계 미국인 지휘자 피터 니콜로프가 안익태와의 불화로 연주를 포기하고 돌아가며 이 곡과 유사한 곳이 많다고 의혹을 제기한 것인데, 결국 선율 구조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과 안익태가 불가리아를 방문하기 이전에 작곡이 완료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작곡 동기가 임시정부나 미주 한인단체 등의 위촉을 받은 결과이거나 상업적 목적에 의한 의뢰가 아니라 음악가로서의 개인적 사명감에서 작곡했다는 사실이다. 안익태가 1950년 8월 어느날 미국의 거리에서 한국전쟁을 보도하는 뉴스에서 자신이 작곡한 것이 국가로 연주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작곡가 자신에 의한 이 같은 직접 진술 기록(윤치호가 가족에게 남긴 자필 가사지에 ‘1907년 作’으로 밝힌 것도 마찬가지이다)은 어떤 기록에 견줄 수 없는 신뢰성을 담보한다. 그러니까 이 기사의 발굴, 공개로 1935년 11월 작곡했다는 사실은 23년 전에 확인된 사실이 된다. 그런데도 아직도 최근의 애국가 기사에는 1936년을 작곡 시기로 하고 있다. 이는 국민적 상식도 갖추지 못한 한심한 작태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이런 보도가 있었는데도『이달의 인물 안익태』라는 자료에서 36년설을 그대로 답습했다는 점이다. 하루 빨리 국가 공적 기관에서 이를 바로잡아 확정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인물에 대해 그의 생애를 바르게 정리하여야 함은 후인으로서 사명인 동시에 기본적인 예의이기도하다. 하물며 국가 애국가의 작곡 시기를 정립하지 못한 것은 역사인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결국 오늘의 우리가 얼마나 비상식 속에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국가 애국가는 이미 작사 시기와 작사자가 밝혀진대로 ‘1907년 윤치호 작사, 1935년 안익태 작곡’으로 정립되어야 한다. 행정안전부와 국사편찬위원회는 적정한 절차를 거쳐 이른 시일 내에 확정해야 할 것이다.【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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