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주인공 장그래 사원에게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으며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는 것은 물론 “고졸이 뭘 알겠어.”등의 인격적 모독을 일삼는 것도 모자라 여직원들에게 언어 성폭력까지 자행하는 등 드라마 방영 당시 최악의 직장상사 1위로 뽑혔다. 또한 자신의 친인척이 설립한 유령회사를 이용해 사적인 이익을 챙기려다가 주인공 장그래 사원의 기지로 폭로되면서 전통적인 권선징악의 카타르시스를 시청자에게 선사하며 극중에서 퇴장하게 된다.
그런데 그의 퇴장을 그저 통쾌하게만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은 사라져가는 그의 모습 뒤로 비추인 박 과장의 과거 때문이었다. 그렇다. 그도 처음에는 동료들과 합심하여 대규모 계약을 성사시키며 회사에 혁혁한 공을 세운 유능한 상사맨이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순간 자신이 이뤄낸 일에 대한 보상이 명예 말고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허무함을 느낀다. 그리고 바쁘게 업무를 처리하는 동료들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직하게 한 마디 내뱉는다. “재미없네.”
여기까지는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는 일이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바쁘게 스트레스 받으며 살아가지만 결국 쳇바퀴 돌 듯 무료한 일상들. 요즈음 세상에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나 여기까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묵묵히 가던 길을 가던가 아니면 자신의 행복을 위해 과감히 다른 길을 택한다. 박 과장처럼 거래처 사장이 내미는 봉투를 거절하다가 결국 받아버리고, 화장실에서 떨리는 손으로 금액을 확인하여 안주머니에 집어넣지는 않는다. 박 과장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척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걸어야 하는 그 길에 자신만을 위한 삽질(?)로 길을 훼손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삽질과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가는 것은 백지장 한 장 차이다. 그 작은 차이가 10년, 아니 인생을 좌우하게 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마치 순간적으로 과속운전을 선택하여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가는 결과를 초래하는 최악의 한 수와도 같다. 게다가 이 순간의 선택은 대개의 경우 이 정도에서 멈추지 않고 공동체와 사회에 피해를 주든지 혹은 혼자 죽지 않고 다른 교통사고 사상자를 내는 식으로든지 착하게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도 파괴해 버리고 만다.
“순간순간에 성실한 최선이 반집의 승리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순간을 놓친다는 건 전체를 잃고 패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은 언제부터 순간을 잃게 된 겁니까?” 라는 장그래의 독백처럼, 박 과장은 순간을 잃으면서 전체를 잃게 되었고, 드라마에서 사라져갔다. 남아있는 자들은 박 과장이 놓친 순간을 잃지 않고 바르게 살아가려고 성실한 최선을 다할 뿐이다.
결국 청렴(淸廉), 그것은 순간순간을 ”착하게 살자“라는 말을 고상한 두 글자로 바꾼 것에 다름없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