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인조 때 제주 사람들이 섬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금지한 조치였습니다. 제주 사람들이 섬을 떠나게 되는 것은 척박한 토지와 빈번한 자연재해 등으로 생활이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제주에 부임한 중앙관리들과 제주 토호세력들의 수탈에 시달렸고, 과다한 공물(貢物)과 진상(進上) 부담, 과중한 군역(軍役)의 부담도 섬사람들을 밖으로 내쫓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제주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다른 지방으로 떠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섬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통행증(通行證)인 ‘출선기(出船記)’를 발급해서 뭍으로의 이주를 통제하고자 하였습니다. 급기야 섬사람들을 회유하고 통제하는 각종 조치를 내렸지만, 츌륙하는 도민들은 점점 늘어만 갔습니다. 나라에서는 공물(貢物)을 담당하고 군역을 담당할 사람들이 줄어들자, 제주도민의 출륙을 원천적으로 막는 출륙금지령을 내린 것입니다. 인조7년(1629) 8월이었습니다. 이 조치로 섬사람들은 200여년간 섬 안에 갇혀 살았던 것입니다.
어쩔 수 없었던 최선의 선택이었다고는 하지만,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자 떠나려했던 외유의 길도, 큰 스승을 만나 정진하려했던 유학의 길도 막아버렸던 것입니다. 적어도 이러한 조치는 새로움에 대한 도천 자체를 우리 도민에게서 앗아가버린 결과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반면 올 수는 있어도 떠나갈 수는 없었던 제주는 이곳에서 나는 것만을 재료로 이용해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또 다름을 개발하기 보다는 경험을 밑천으로 익숙함으로 달련된 삶을 살았습니다. 당장의 호구가 문제였지만 사람된 도리로 큰일을 치루기 위해 겹부조의 관행을 만들어야 했으며, 어려운 형편 자손된 도리로 조상을 모셔야 했기에 재사가름의 풍습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 땅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살아가야 했던 그 시절이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우리에게 준 것은 아니었을까요?. 적어도 그것이 제주만의 고유성으로 남아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보편적 가치로서 거주와 이주의 자유를 제한할 권한은 어느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나고 자란 익숙한 곳으로서 고향 제주는 물론,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 지친 심신을 달래려고 평온한 바다가 있는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늘 길이 열리면서 언제나 오갈 수 있는 곳이 되면서 일을 찾아오는 많은 젊은 사람들도 있고, 황혼의 노구를 이끌고 유유자적 세월을 소일하며 보내고자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은 바뀌었지요? 출륙을 금지하지 않으면 국민의 의무로 꾸려지는 국가의 운영이 되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이런 저런 사연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기회를 얻고자 찾아오는 기회의 땅이 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저변에는 200여년간의 출륙금지령이 청정성과 고유성의 가치를 극대화시킨 것 때문은 아니었을가요? 새로운 도정(道政)이 청정성과 고유성의 가치는 물론, 사람의 가치를 키우는 섬으로의 개발을 도정의 목표로 삼고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두의 가치가 더욱 존중되어 모두가 풍요로움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잇는 그런 세상이 되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