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섯동네 우리 집
[기고] 섯동네 우리 집
  • 채널제주
  • 승인 2023.10.12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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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신 수필가
김순신 수필가
▲ 김순신 수필가 ⓒ채널제주

제주토박이면서도 제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많다. 제주문화원의 문화대학에 등록했다. 제주의 역사와 문화를 아우르는 다양한 강의가 이루어진다. 매주 월요일 오후 두 시간 강의를 듣는다. 현장 답사를 통해서도 배우니 즐거움이 두 배다.

현장 답사로 성읍리를 찾았다. 성읍마을은 조선 시대의 읍치(邑治)였던 곳이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읍성 가운데 전통적인 모습이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원형을 유지하지 못한 곳이 많지만, 성읍마을은 중산간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나마 원형이 잘 보존된 곳이라고 했다.

특히 민간의 주거 공간이 읍성 내부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례는 전국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18세기 19세기에 지어진 제주의 전통가옥들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고평오 고택으로 들어갔다. 안 거리, 밖거리, 모커리가 있는 집이다. 초가지붕과 흙담 벽과 난간이 정겹다. 유년 시절 내가 살았던 집의 구조와 닮아서 친근감이 든다.

어린 시절의 우리 집도 이문간, 안 거리, 밖거리, 쇠막이 있는 초가집이었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안거리는 4칸 집, 밖거리는 2칸, 쇠막은 2칸 집이었고 통시가 있었다. 안거리는 난간, 상방, 큰방, 족은 방, 족은 방 뒤에 더 족은 방이 있었고, 정지 옆에는 쳇방과 고팡이 있었다. 우리가 안거리에 살고 할머니는 밖거리에 사셨다. 부모님이 자식 일곱을 키우신 집이다.

초가지붕을 일기 위해 부모님은 산에서 새(띠)를 비어서 소달구지에 싣고 왔다. 새를 마당에서 잘 말리기도 하고 더러는 집줄을 놓는다. 집줄을 놓을 때는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 이웃 삼촌까지 나서서 함께 했다. 집줄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네 사람이 필요하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각각 한 가닥의 줄을 호랭이를 이용해 계속 돌려주어야 하고, 삼촌은 어울리게를 가지고 두 줄을 만나게 하고, 아버지는 뒤치기를 이용해 계속 줄을 돌려야 한다. 그러면 굵고 단단하게 꼬아진 집줄이 되는 것이다. 호랭이는 나무로 만들어졌는데, 한쪽 고리에 걸어서 계속 돌리면 꼬아진다. 마치 영어 z 자 모양에다가 돌리는 손잡이가 있다. 집 줄 놓기는 호랭이 돌리는 사람과 어울리게를 이용하는 사람, 뒤치기하는 사람, 네 사람이 호흡이 잘 맞아야 집줄이 고르게 잘 꼬아진다.

동생을 업은 채 마당을 서성거리며 밭일 나간 어머니를 기다렸던 집, 난간에서의 공기놀이도 생각난다. 책보를 난간에 휙 던져놓고 재빨리 놀러 나가기도 했다.

집의 구조상 난간은 잠시 머무는 곳이기도 하고 밖의 동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외부인과 간단한 용무는 주로 난간에서 이루어졌다. 신발을 벗지 않고도 걸터앉을 수 있는 공간이다. 마당, 밖거리, 쇠막의 동태를 살필 때도 난간에 나오면 한눈에 다 보인다. 안거리와 밖거리까지의 거리는 급할 때 부르면 들릴 정도의 거리다. 제주에서는 부모가 며느리를 보면 안거리를 물려주고 밖거리로 나와 살았다. 부모 사이도 같은 지붕보다는 각각의 공간을 존중해주는 밖거리의 문화가 지혜롭다는 생각이 든다.

마당에는 소먹이 촐 눌, 고구마 눌, 땔감 눌도 있었다. 햇빛 좋은 날은 멍석에서 콩, 보리 등을 말렸다. 눈 쌓인 마당에 좁씨를 뿌려놓고 참새를 기다리던 기억도 있다. 난간을 오르면 상방이나 방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이 각각 있다.

상방은 집의 가운데 공간이라 현대의 거실 역할을 했던 곳이다. 우리 집 제삿날에 친척들이 모여들면 남자들은 상방이나 큰방에 앉았고, 아이들은 족은방, 여자들은 정지나 쳇방에 앉았다. 여름에는 상방에 모여 수박도 먹고 상방에 모기장을 치고 그 안에서 동생들과 함께 잤다. 겨울에는 굴묵을 땐 족은 방, 큰방으로 모여들었다. 밤에 화장실 갈 일이 있을 때는 동생 손을 잡고 마당을 건너 통시에 가야 한다.

오래전 학생들을 데리고 현장학습으로 성읍리를 찾은 적이 있다. 가장 관심거리는 통시와 똥돼지 이야기이다. 돼지가 킁킁거리는 것을 피해 막대기로 돼지를 쫓으면서 용변을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은 깔깔거렸다. 성읍마을에 통시에는 똥 싸는 아이와 돼지의 모형이 익살스럽게 재현되고 있어서 업그레이드됐구나 하며 웃었다.

정지와 쳇방은 어머니와의 추억이 많은 곳이다. 어머니의 하루는 정지에서부터 시작된다. 새벽에 식구들 먹거리를 만드느라 솥 덕을 여닫는다. 밭일하다가 어스름에 돌아와도 먼저 들어가셔서 씻고 구석에서 옷을 갈아입으셨다. 나도 정지 한쪽에서 자주 옷을 갈아입었다. 정지에 남자가 들어올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터이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안 된다.’는 남존여비의 사상이기도 하지만 달리 해석하면 여성만의 공간을 보장해 준 배려의 산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정지에 들어서면 물항이 한쪽에 서 있고 무쇠솥이 나란히 앉아 있고, 한쪽에는 지들커(땔감)가 쌓여 있다. 물항에는 물이 늘 채워져야 했기에 어릴 때부터 물허벅 지는 것을 배웠다. 불 지피는 방법도 차차 터득하게 되었다. 땔감은 많이 넣기보다 공기가 잘 통하게 해야 불이 잘 탄다는 것을. 땔감은 종류에 따라, 건조의 정도에 따라 불이 잘 타기도 하고 힘들게 타기도 한다. 잘 다스리지 않으면 연기로 앙갚음을 한다. 잘 타다가도 비위가 상하면 순간 불이 꺼진다. 거무스름한 연기를 피워올리며 농성을 하면 눈물이 앞을 가려도 다시 후후 불면서 불을 살려내야 연기농성이 풀린다. 정지의 흙벽은 연기에 그을려서 거무스름했다.

아궁이 앞에 앉은 모녀의 얼굴은 불빛에 익어 발그레해진다. 모녀간의 이야기도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다. 딸의 속상한 일도 탁탁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던지고, 어머니의 서러움, 섭섭함도 아궁이 속으로 꾹꾹 쑤셔 넣는다. 삶의 가시들을 불 속으로 던져 태워버린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위로받던 곳이 정지였다.

쳇방에는 찻장이 한쪽에 있었고 뒤쪽 장독대로 나가는 문과 고팡으로 가는 문이 있었다. 솥에서 밥을 뜨면 아버지의 밥상은 따로 차려 큰방으로 가져갔고, 다른 식구들은 쳇방에서 밥을 먹었다. 아이들이 일곱이나 되니 밥 낭푼이도 금방 바닥났다. 반찬 타령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간식으로 찐 고구마, 막걸리 빵, 메밀 고구마 범벅이 생각난다.

쳇방에 대한 추억은 또 있다. 나에게는 작은 도서관과 같은 곳이었다. 우리 집 쳇방은 신문지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벽이 책인 셈이었다. 읽을거리가 별로 없을 때라 벽에 있는 글들을 읽는 시간이 재미가 있었다. 벽에는 세상 소식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심부름을 시켜도 그 신문기사를 읽다 보면 듣지 못해서 혼나기도 했다.

내가 살았던 마을 연동 섯동네는 신도시가 되어 빌딩 숲이 되었다. 당시 마을의 모습은 흔적도 없다. 그 마을 모습도 아련하고 우리 집의 방 하나하나에 담긴 소중한 추억들도 점점 아련해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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