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태식칼럼](79)잘 나가는 장사를 접고

현태식 전 제주시의회 의장

2015-12-03     영주일보

고달픈 삶을 면하려고 일 속에 묻혀 살다보니 아내가 탈진해버렸다. 나는 항상 병자이니 내가 해야 할 일만 마치면 방에 들어가 휴식을 취했다. 내 아내도 그걸 인정하고 점포를 10년 가까이 운영할 때에도 가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기가 처리하려고 하였다. 중앙로에 이사온 후는 사업이 번창하여 부두에서 중앙로 일대로 물건을 배달하는 마차가 우리 점포에 제일 많이 오갔다. 우리 점포에 들어오는 물건의 양을 보고 주위에서는 입을 벌렸다. 보통 마차로 10대분이 들어오면 대여섯대분은 당일 소매상으로 발송해야 한다. 이 물건의 포장을 풀고 정리하고, 다시 포장을 해서 발송하는 일이 쉬는 날 없이 반복되었다. 이 물건이 모두 쇠붙이니 무겁기가 여간 아니었다. 이런 일을 몇 년동안 했으니 자식 넷을 키우며 뒷바라지 하고, 병약한 남편 약 시중 들지, 점포 내의 일을 처리하지, 무쇠덩이라도 닳아질 수밖에 없었다. 건강했던 부인이었지만 더 이상 일을 못하고 축늘어져 누우니 이젠 사업도 정리하여야 할 시기라고 판단했다. 70년대 초반에는 기술배우겠다며 취직시켜 달라는 사람이 많아 종업원 구하기도 수월했지만 새마을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경제상태가 좋아져가니 벌써 자전거점포 일도 기피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종업원 채용이 어려워졌고 오토바이에 이어 삼륜자동차가 쏟아져 나와서 자동차 시대를 예고하고 있었다. 자가용이 늘고 화물차가 많아져가니 마차가 들어가버렸고, 짐운반용 자전거 수요가 감소하고 있었다. 그런걸 감안하면 사업은 남이 감지 못하는 가장 적절한 시기에 손을 떼야 한다. 사업은 절정기에서 사양길로 접어든 것이다. 자전거가 사양길에 들어서면 수요층은 어린이와 레저용뿐이 된다고 보고 있었다.

자전거 업계에 투신한지도 10년이 다되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제주도내 자전가업계에 대혁신의 바람이 불었다. 우선 제주삼천리상사가 발족한 후로 소비자 보호라는 뜻을 현실화 시켰다. 소비자에게 대한민국에서 생산되는 제품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소비할 권리를 인정해준 것이다. 공급자가 폭리를 해서 소비자를 수탈하던 시대가 끝났다.

따라서 자전거판매수리업자는 열심히 일한 대가를 받아야 생계를 그나마 유지한다. 예전처럼 한 건 하면 술판 벌이고 집안 살림 할 수는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물건을 등급별로 전시하고 고객에게 솔직하게 설명을 해서 C급을 A급이라고 속여 팔거나 터무니없이 비싸게 팔지 않고, 등급별로 가격 차이가 있는대로 원가에 정당한 이윤을 붙여 판매하였기 때문에 이 소문이 시장 전체에 미쳐 과거처럼 속이고 장사할 수 없는 시대를 열어놓았다.

나는 ‘박리다매’를 장사의 원칙으로 했고, 낭비없이 철저히 저축하였다. 사실 나는 중앙로 점포를 짓기 전까지는 다방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신 적이 없다. 그리고 친구나 아는 사람에게서 얻어먹은 바도 없다. 혹시 사주겠다는 사람이 있어도 무슨 핑계를 대고서라도 그 자리를 피했다. 그 사람에게 신세지면 반드시 갚아야 하고, 갚지 못하면 험담으로 돌아오고 인심도 잃게 된다. 시간 잃고 남에게 신세 지는 행위는 아예 하지 않았다.

중앙로에 이사와서 2~3년 되니 아내가 쓰러지고는 했지만 그래도 자금여유는 조금 생겼다. 그래서 아내 보고 장사를 그만두자고 했더니 아내가 펄쩍 뛴다. 이유인즉 지금이 장사해온 중 제일 잘되고 있으니 일년만 더하면 집 한 채는 벌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은 맞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아내가 몸져 누워있으면 병원에 입원해야 하고 그러면 번 돈은 병원비로 다 날리고 점포는 주인이 철저히 관리못하면 종업원 좋은 일 시켜 얼마 지탱못하고 파산하게 된다. 그러니 정리하고 농장이나 조그맣게 장만해서 휴양겸 관리하면 지금까지 고생하며 만든 결실을 우리가 소유하게 될 것이니 고집부리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런데 이때 부산지사에서 제주삼천리가 판매신장세가 왜 완만한가 하고 신장률 저조에 대하여 묻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이때가 이 사업을 종결할 시점이라고 직감했다. 왜냐하면 제주도의 소비시장이 협소하여 흥미를 잃고도 있었다. 남자는 큰 사업을 하려면 무대가 넓어야 하는데 국내적으로 경쟁하려면 서울에 근거를 잡아야 하고, 국제적으로 활동하려면 다국적 기업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최대한으로 노력하여 제주도 전체 시장의 95%를 점유하고 나니 나머지 5%는 인력으로는 불가능했다. 어느날 본사 사장님과 부산지점장님이 제주에 오셔서 여행을 하고 돌아가면서 제주에 삼천리자전거 보급률이 90%가 넘는다고 하셨다. 사업가는 직업의식이 있어 어디를 가나 자기 직업과 관련시킨다. 사장님도 여행지에서 지나가는 자전거 수를 세고 그 중 자기가 취급하는 상표가 몇 %가 되나 확인한 것이다.

정말 마음껏 활동 못하는 좁은 섬은 능력과 재주를 발휘할 무대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5%는 다른 회사의 자전거 업자도 아주 수완이 없다 하여도 친구, 친척처럼 가까운 사람은 팔아주기 때문에 이런 경우까지 나의 고객으로 끌어들일 수 없고, 끌어들여도 안된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장사도 좋고 돈 버는 것에 독이 올라있다 해도 다른 업자의 형제 부모에게까지 당신의 자식을 외면하고 내 물건을 사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렇게 되면 혈육의 정도 없는 인륜을 배반하는 것이기에 안되는 일이라고 깨달았다. 본사 사장님께 통지를 했다. “저는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시장점유율이 어느 정도 올라가니 여기에도 수확체감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나머지 5%는 나로서는 정복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사업 수법이 벌써 녹슬고 구시대적이 된 것 같으니, 대리점 자격을 회수하여 더 유능하고 수완있는 새로운 업자를 선택하셔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바뀌면 그 사람을 따라오는 새로운 손님도 있게되어 시장이 확대될 겁니다”하고 대리점권을 반납하였다.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제주에서 제가 유능하다고 생각되는 분을 추천할 터이니 심사해서 괜찮으면 대리점계약을 체결하여 주십시오”하고 요청하였다. 이것도 받아들여졌다.

이래서 자전거 업계에 발들여 놓은지 9년8개월만에 손을 떼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