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태식 칼럼](17)고난의 고학길

현태식 전 제주시의회 의장

2015-05-06     영주일보

1959년 봉개에 피신하여 공부하다 가을이 되어서 서울로 올라가게 되었다. 초등학교를 같이 졸업한 고성남이라는 친구가 우리 동네에 있었다. 동네에서는 유일한 동창생이어서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그는 집이 매우 가난하였다. 어머니 혼자서 2남1녀인 자녀를 키우는 집의 작은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안계셨다. 우리 동네는 4·3사건 후에 곳곳에서 모여든 사람으로 이루어진 마을이고, 6·25때는 비행장에 미군이 많이 주둔하게 되면서 미군 부대와 연관된 일들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았다. 성남이네 집안 내력은 나는 잘 모른다. 특히 친구의 아픈 데를 꼬치꼬치 캐묻는 것도 그렇고 해서 친구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모른 채로 지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그 집에 찾아가곤 했다. 그는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너무나 가난하였기 때문이었다. 목공소에 취직하여 다녔다. 시내에 있는 가구점이었다. 목공기술을 배워서 나에게 책꽂이도 만들어 주었다. 그 책꽂이 문에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글자를 새겨주었다. 가난한 선비가 여름밤에는 반딧불을 등잔 삼고, 겨울에는 문 앞에 눈을 모아놓고 눈의 반사된 빛을 등잔 삼아 공부를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고사(故事)가 아닌가. ‘정말 꾸준하고 열심히 공부하라.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런 간절한 뜻을 전하는 것이리라.

그런 그가 서울로 일자리를 찾아 올라갔었는데, 내가 어려운 것을 알고 안타깝게 생각하여 같이 와서 있으면서 공부하고 내년에 입학시험을 보라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자기는 가구공장에 일다니며 돈벌고 있으니, 방세는 내고 지낸다. 걱정말고 올라오라고 몇 번이나 편지가 왔다.

여기 있어봐야 공부가 잘 되는 것도 아니고 해서, 그 친구에게 가기로 하고 가을에 상경했다. 그래도 형님께서 매달 몇 천환씩 보내주셨다. 쌀값은 되는 금액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내 몸속의 갖가지 병의 증상이 중증으로 진행하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때는 젊었고 또 매우 긴장하고 있는 탓이었을 것이다. 기억력이 매우 감퇴되는 것은 나의 정신집중이 안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잡념과 번민을 털어버리고 공부에 몰두해야 한다고 스스로 채근하고 있었다.

친구가 사는 곳은 정릉 깊은 골짜기 산비탈에 지은 무허가 건물의 방 하나였다. 친구는 매우 반가이 대해 주었다. 방에는 연탄을 때어 따뜻했다. 문을 열면 숲의 우거진 전망이 좋고, 시냇물이 흐르고 밭이랑이 가지런히 넓게 뻗어 있는 조용한 곳이었다. 밥을 먹어도 순잡곡밥이 아닌 흰쌀을 섞어 먹으니 식생활도 너무나 좋았다.

그런데 이 생활이 얼마 가지 못하였다. 친구가 직장생활을 꾸준히 하지 못하고 일주일이나 길면 보름 일하고 딴 곳으로 일터를 옮긴다. 때문에 그 동안 일한 품삯을 받아오지 못하는 것이었다.

끈기 있게 한 직장에 다녀야 기술도 제대로 배우고 월급도 올라가는 것인데 그렇지를 못했다. 1960년대는 먹을 것이 없어 유랑걸식하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은 때였다. 일자리 구해 헤매던 때이니 직장 주인의 행패가 말이 아니였다. 조그만 것도 트집잡아 돈 안주고 내쫓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런 판이라 주인이 트집을 잡고 욕을 하고 못살게 굴면 나와버리게 된다. 그럴 때 품삯을 주라고 하면 한 달도 근무 안했는데 돈은 무슨 돈이냐며 욕이나 하지, 제대로 일당을 주는 주인은 가물에 콩나듯 했다.

친구가 이러니 나의 생활비로 두 사람 같이 쓰게 되었다. 그러니 나도 돈이 떨어지게 되고 그러면 굶어야 하는 판이었다. 지난 날들은 먹는 걱정은 안했었는데 이젠 굶게 된 것이다. 번민이나 괴롭다고 하는 것은 사치스런 생각이다. 목구멍에 풀칠하는 일이 발등의 불이 된 것이다. 그렇게 친한 친구도 모르는 사이에 정이 멀어져 가고 사이가 벌어져 가는 것이었다. 서로 말수가 적어졌다. 돈이 떨어졌다고 하면 거짓말로 여기는 것이었다. 며칠씩 직장 찾아다니다 직장을 구하면 그 친구는 직장에서 밥을 해결하고 나는 굶어야 하고 방세를 제 때에 갚지 않으니 집주인의 비위를 잘 맞춰 내쫓기지 말아야 하게 된 것이다. 외롭고 고단한 타향살이에 울어야 했다. 친구가 다니는 직장에 찾아가 보았다. 주인은 그가 가구를 잘 못만들어 일당을 주기는 고사하고 손해배상을 받아야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같이 어린 사람 부려먹고 착췩하는 악질주인을 고발해도 이 당시에는 소용없고, 이 땅에 법이 있는지 양심이 있는지 정의가 존재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내 친구가 보름쯤 일했으나 일당을 주지 않은 곳을 찾아가 보았다. 돈암동에 위치한 건물도 훌륭한 저택이었다. 주인을 뵙고 정중하게 인사하고 “의지할 곳 없는 고학생들이니 자선을 베푸는 셈 치시고 일당을 계산해주십시오.” 하고 말씀드렸더니, 그 주인은 돈 주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자기 형님이 광주고검의 검사고 어디 누가 있고 하면서 우리 어린 사람들에게 은근히 협박만 늘어놓는 것이었다. 일당받기는 글렀다. 뒤돌아 나오면서 생각하니 하도 억울해서 당시 소문에 깡패를 데리고 가면 받을 수 있다고 해서 양림동에서 소문난 깡패를 당구장에서 만나서 어려운 사정을 말했더니 같이 가주었다.

대문 안에 들어서자 외출하려고 신발을 신던 주인이 어찌나 눈치가 빠른지 그냥 방으로 들어가더니 부인은 부리나케 이불을 펴고 남자는 아파죽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내가 얼른 마루로 올라가서 “어째 신 신다 말고 들어와 꾀병을 하고 계십니까?” 라고 말했더니 멀쩡하게 앉고 나서 “지금 돈이 없으니 일주일만 있다 오면 주지.” 라고 했다. 돈도 정말 필요했고 일주일 되는 날 가면 깡패들이 먼저 받아갈까봐 하루 전에 가서 약속대로 돈을 달라고 했더니 그 깡패들이 그 다음날 와서 받아갔다는 것이었다. 그 깡패를 찾아가 돈 달라고 했다간 두들겨 맞을 것이 뻔하고, 우리 힘으로는 정말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땅을 치며 원망하고 허공을 향해 분노를 터뜨려 봤지만 소용없었다. 할 수 없이 노동판으로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막노동판에 나가면 백환 내지 2백환은 받을 수 있었다. 한 달에 며칠 날품팔이 하고 공부는 계속하였다. 내 친구는 자기도 미안해서 아예 공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와 나는 얼싸안고 울기도 많이 했다. 그러나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겨울이 되어 가물면 주위 사람들이 공동으로 먹는 우물 용출량이 적어져 어려움이 많았다. 우물은 300여 미터 거리에 있었으나 어두운 밤에 다니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추운 날은 영하 18도까지 막 내려간다. 문고리를 잡으면 손이 쩍쩍 달라붙는다. 그렇지만 밤 한시가 넘으면, 모두 잠들어 물길로 오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우물에 물이 고인다. 그것을 주인집 항아리에 가득히 채워드린다. 양동이에 물을 담고 오는데 발을 헛디뎌 넘어지며 물을 뒤집어쓰는 밤엔 온 몸이 고드름이 되는 것 같은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방세도 제대로 못 내는데 이렇게라도 해서 주인의 환심을 사야 겨울에 내쫓김을 면하려는 궁여지책이었다.

그 해 겨울을 넘기고 봄에 다시 서울법대에 시험을 쳤으나 보기좋게 이번에도 미역국을 먹었다. 이제는 더 견딜 기력도 없었다. 집에 돌아올 체면도 용기도 없었다. 동창생이나 고향의 사람들을 만나는 게 겁이 났다.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일년을 쉬었다 갔으므로 동창생은 선배가 되어 있었고, 일년 후배와 공부하게 되어 자연히 친한 친구가 적었다. 그래서 동창을 만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정말 외톨이가 된 것이다. 유일한 친구인 성남이도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친구라고 해서 찾아가면 푸대접하지 않은 사람은 마포에서 부모님과 어렵게 살면서 국제대학 야간부에 다니는 김병현 뿐이었다.

집세도 안내고 친구도 떠난 방에는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덮던 이불을 새끼줄로 묶어 어깨에 메고 마포 친구네 집에나 가보자고 나섰다. 그런데 주인이 쫓아와서 집세 내고 가라는 것이다. “나는 돈도 없고 친구 방에 얹혀사는 처지였는데 나더러 세 내라면 어쩝니까? 아무리 집세를 내려고 해도 돈이 없는 걸요.” 하고 대답했더니 매질을 하는 것이었다. 뺨도 때리고 걷어차기도 하면서 이불이라도 내어놓으라는 것이었다. 이 이불을 빼앗기면 큰 일이었다. 어디서 얼어죽을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 때까지도 어느 정도 나는 흥분하지 않았다. 잘못 했으니 당할 수 밖에... 어떻게 하든지 이 사지를 벗어나야지 하는 생각뿐이었다. x새끼, 무슨새끼 하면서 인간 취급하지 않고 소, 돼지나 개처럼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나도 이런 교양 없는 사람과 더 이상 상대해서 사정할 수 없다 생각하고 어거지로 나왔다. 그러니 이불을 빼앗으랴, 안 빼앗길라 실랑이가 벌어지면서 그 집과는 거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욕듣고 매맞고 그러면서도 몇 발짝씩 옮기고 있었는데 새벽에 출발해 정릉을 빠져 아리랑 고개 넘어 돈암동, 원남동을 통과할 때쯤 해서는 이미 저녁 노을이 지고 있었다. 금세 언덕너머 해가 사라질 듯 했다. 이 때서야 주인이 당신 근무시간이 다되어감으로 할 수 없이 나를 내버리고 욕을 하면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밤에 정릉 버스종점에서 버스를 감시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주저앉아 한참동안 원통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아무리 인간이 비참하게 되어 재기불능 상태라 하더라도, 사람의 인격을 완전 무시하고 개 취급할 수 있는가? 나는 정말 이제 끝장인가? 정말 내가 인간인가? 하고 생각하니 분노가 막 치밀었다. 그래도 가야 한다. 어두운 길을 하루종일 먹지도 못한 채 서대문 아현동 넘어 마포 공덕시장 골목을 뱅글뱅글 돌아 친구인 김병현 집에 도착했다. 그 집에서는 밥도 주고 앉아있기가 어려운 낮은 다락방이지만 잠자리도 마련해주었다. 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며칠 후 나는 갈 곳이 없어 다시 정릉골짜기 피난민이 모여 사는 무허가 촌으로 들어가 막노동판의 일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