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태식 칼럼](6)4·3 전야
현태식 전 제주시의회 의장
2015-04-09 영주일보
나는 아홉 살 때부터 눈발이 내리는 초봄이나 뙤약볕이 내리쬐는 여름철이나를 불문하고 밭에 가서 김매고 농사짓는 일을 했다. 이러던 어느 날 어머니와 형제들이 밭일을 하고 있는데, 동네 큰형 또래 사람들이 와서 큰형을 불러가는 것이었다. 그 사람들의 말을 안들으면 안되는 것으로 되어 있는 듯 했다. 어머니께서는 형은 가도 우리는 부지런히 일을 해야 밥 굶지 않으니 게으름 피지 말라 하셨다. 정말이지 식구는 많은데 곡식이 잘 되지 않으면 양식이 없어 굶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해방이 되기 전, 일제가 공출이라 해서 곡식을 많이 거두어 갔기 때문에 누구네 집은 아궁이에 불을 못 땐지 며칠이 되었다고도 하고, 어느 집은 밥짓는 연기가 나지 않는다고 말을 들은 적도 있다. 굶는 일이 얼마나 비참한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어머님의 말씀대로 부지런히 일을 하였다. 그래서 동리에서도 우리 집은 아이들이 착하고 부지런해서 새 부자가되었다고 했었으며 어떻든 밥 굶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공산주의가 좋다면서 모이고 밭에서 형을 데려가는 것이 4·3사건의 첫 단계인 것을 나는 너무 어려서 몰랐다. 이렇게 비극의 전주곡은 이미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즈음 걱정스러운 일이 계속 일어났다. 우리 집 북쪽은 마을로 올라오는 첫 어귀다. 군인이나 순경이 마을로 진입하는것을 지연시키기 위하여 집 북쪽 길 위에 돌을 쌓아 막는 것이었다.
경찰차나 군인차가 올라오다 멈추고 돌을 치우면서 우리 식구들을 불러다 같이 치우도록 부역을 시켰다. 동네 으슥한 곳에서는 사람들이 보초(일명 ‘비께’라고 함)를 섰다가 군경이 올라오면 신호를 보내고, 이걸 본 동리 사람들은 산으로 도망쳐서 숨었다. 돌로 길을 막는 것은 길을 트는 동안 피신하는 시간을 벌자는 것이었다. 매일 돌무더기를 쌓아 통행로를 차단하고, 순경이나 군인이 와서 헐어버리기를 반복하였다. 차를 타고 올라오던 군경은 으례 우리 집 식구들과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네 식구들을 동원해서 강제로 돌을 치우게 했다.
돌을 치운 우리 가족들은 동리에서 반동 취급을 받고 미움을 받게 되었다. 결국 위아래 양쪽에서 의심받고 시달리는 신세가 된 것이다.